늦바람이 들어 요즘 대학원 진학을 준비중이다. 뒤늦은 향학열? 그게 아니라 영화 기자랍시고 대충 주워들은 걸로 더 이상 혹세무민하기엔 무식함이 한계를 넘어섰다는 걸 절감하기 때문이다. 채워야 비워낼 수 있으니.
원서를 준비하면서 몇가지 갈등이 있었다. 우선 한 한기에 600만 원에 이르는 등록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가 가장 먼저 부딪힌 걸림돌이었다. 교육 비용의 수익자 부담원칙이 철저하게 적용되는 이 나라에서 학사를 넘어 석사나 박사까지 가방 끈을 늘린다는 것은 가장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함을 의미한다.
나는 교육의 최종 수익자는 개인이 아닌 국가 공동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르면 국가가 학비를 대줘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내 생각이 택도 없다고 말한다. 좋다. 수익자가 나 자신이라고 인정한다 해도 모순은 남는다. 교육 서비스라는 용역을 거액을 내고 구매해야 하는 내 입장에선 원서를 접수하고 면접을 보고 하는 일련의 전형 절차가 가당치 않은 일처럼 여겨진다. 구매자가 그 판매자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얘기인데, 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일인가.
2년 전에도 지원했던 대학원 면접에서 "한 학기 정도 커리큘럼을 보고 계속 다닐지를 판단하겠다"는 말 때문에 낙방했다. 붙으려면 면접관 교수들에게 간 쓸개를 다 내어 보여야 한다는 걸, 그땐 몰랐다. 수익자 부담 원칙에 더해 학위의 희소성을 이용한 판매자 우위의 상황이라니...참 공부하기 지지리도 힘든 나라다.
여하튼 일단 그 얼토당토 않은 일을 저지르기로 했다. 배알이 심히 뒤틀리지만 어쩌겠나. 커리큘럼이라는 강제력을 들이미는 상아탑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스로 알아서 공부할 수 있는 의지력이 안타깝게도 나에겐 없다. 그러니 찍 소리 말고 고개를 숙여야 하리라.
또 한가지 갈등은 전공과 학교 선택이었다. 영화 기자인만큼 남들 하는대로 영화를 전공하는 게 지당하게 여겨지는 분위기가, 나는 이상하게도 싫었다. 게다가 학위를 딴 뒤 한 자리 하려면 중대나 동대 쪽을 기웃거려야 한다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영화판에서 두 학교 출신들이 메인 스트림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거다.
헌데, 그 학교들 출신들이 영화판의 메인스트림이라는 게 끝내 걸렸다. 어쩔 수 없는 아웃사이더 감성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계에 한자리씩 하고 있는 그들이 내 스승과 선배, 또는 학우들이 될 터인데, 기자라는 이유로 그들을 비판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과 학연으로 묶이게 되는 상황이 두려웠다. 해서 결국 두 학교로의 진학을 포기했다. 전공 역시 영화 이론은 나보다 훨씬 훌륭한 학구파들에게 맡기고, 저널리즘과 영상 커뮤니케이션 쪽으로 방향타를 잡았다.
누군가는 나한테 지나치게 경직돼 있다고 한마디 한다. 세상 물정 모른다고 말이다. 그 와중에 영화학계 쪽의 한 교수님으로부터 "바르게 생각했다"며 모처럼 칭찬을 들어 괜히 흐믓했다. 뭐, 지금 시점에서 이런 건 다 괜한 치기다. 아직 붙지도 않았거니와, 붙는다 하더라도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까마득하기만 하다. 어서 학업 계획서나 써야 겠다.
'2008/05/10'에 해당되는 글 2건
- 2008/05/10 대학원 (6)
- 2008/05/10 영화주간지 표지의 정치학 (4)
TAG 대학원
영화 주간지 표지를 보면 영화판 사정의 단면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한국영화 배우들이 표지를 잇따라 장식하던 시절이 엊그제인데 최근 영화주간지들을 보면 외국 배우들이 참 많이 나온다.
내가 7년간 몸담았던 FILM2.0만 해도 지난 3월 이후 발행된 11번의 주간지에서 한국영화 출연배우가 표지 모델로 등장한 횟수는 단 3회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 '비'가 한번 나오긴 했으나 그는 할리우드 영화 <스피드 레이서>의 배우 자격으로 포즈를 취한 것일 뿐이고, 나머지는 <천일의 스캔들><연의 황후><아이언 맨><인디애나 존스> <라스베거스에서만 생길 수 있는 일> 등의 배우들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런 사정은 '대한민국 영화주간지의 표준'을 자처하는 씨네 21도 크게 다르지 않다. 90년대 중반 창간했을 때만 해도 고집스럽게 한국영화 배우들을 표지 인물로 내세웠던 이 잡지의 전통 역시 시나브로 사라졌다.
이런 정황은 영화주간지에서 표지로 내세울만한 한국영화 배우가 없다는 얘기이고, 그만큼 시장에서 한국영화가 죽을 쑤고 있다는 반증으로 읽힌다. 필연적으로 대중 잡지는 독자들의 관심 방향과 시장의 트렌드를 좇을 수밖에 없으니,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과 수요를 넘어 공급 자체가 급감한 상황에선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한국영화 사랑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로선, 이런 상황이 썩 씁쓸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다만, 영화 매체의 존재 이유와 관련해 다른 차원의 씁쓸함을 감추기 어렵다. 지난주 지하철 가판대에는 쌍둥이 인디애나 존스가 나란히 걸렸다. FILM2.0과 씨네21 모두 해리슨 포드를 표지 인물로 내세운 것인데, 문제는 두 표지 모두 해리슨 포드가 입은 옷과 포즈가 거의 유사하다는 점이다. 영화사에서 제공받은 사진을 썼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 매체가 거의 완전히 영화 자본에 포획됐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오늘날 영화 잡지의 표지는 거의 광고판과 같은 취급을 당한다. 영화사가 광고 게재를 대가로 표지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생존 자체가 절박해진 주간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인디애나 존스>는 동시에 두 잡지의 표지를 공략(?)할 경우, 노출 효과가 훨씬 클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홍보 효과는 배가됐을지 모르나, 두 주간지의 개성은 사라졌다. 독점을 향한 자본의 욕망은 늘 이렇게 다양한 개성을 죽이는 방향으로 운동하기 마련이다.
이게 어디 할리우드 영화 뿐이랴. 이번호 두 주간지에는 신작 <님은 먼 곳에> 개봉을 앞둔 이준익 감독의 인터뷰가 나란히 실렸다(얼마전 나는 그가 인터뷰 요청을 해왔다며 토크2.1로 다뤄달라는 FILM2.0의 요청을 정중히 사양했다. 인터뷰는 편집적 필요에 의해 기자가 요청하는 것이고 취재원이 수락하는 게 정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충무로에선 이 반대의 경우도 자주 벌어진다). 게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봉준호와 최동훈의 신작 얘기가 각각 특집과 기획으로 다뤄졌다. 두 매체의 관심사가 우연찮게도 동시에 똑같아서 이런 일이 벌어진걸까?
전통적으로 영화 주간지들은 한국 영화산업의 동반자와 같은 대우를 받아 왔다. 한국영화의 전성기와 영화 주간지들의 전성기가 병행돼 온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영화 매체 기자 출신 가운데는 스스로 영화판에 입문한 경우도 꽤 된다. 스스로를 광의의 '영화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내 스스로 영화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건 정치부 기자가 정치인이 아닌 이치와 같다). 그러나 그 대가로 오늘날의 영화 주간지들은 날로 위세를 더해가는 영화 자본의 홍보 대행업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취급을 당하고 있다. 동반자로서가 아닌, 비판적 견제자로서의 위상을 다지지 못한 필연적 대가다. 오타쿠적 감성을 좇다 저널리즘을 홀대한 대가다.
주간지 시장의 열악함만을 탓할 일도 아니다. 겉으로는 대중지를 지향하는 포즈를 취하면서 홍보 대행을 수행하고, 한편으로는 흔들리는 정체성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더욱 영화 근본주의적 도그마에 빠져 있는 게 작금의 영화 주간지들이 처해 있는 풍경이다. 대중 매체의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동시대성과 사회성의 맥락을 놓친 것도 그 많던 영화주간지 독자들을 휘발시킨 결과로 이어진 것이라고, 나는 본다. 초창기의 씨네21에서 영화라는 문화적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웠던 독자들은, 극소수 문화 엘리트들만을 위한 배타적 취향의 향연장이 되다시피 한 '그들만의 리그'를 달가워하지 않게 됐다.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법론을 구사해온 FILM2.0은 가격 경쟁력 하나로 처연하게 버티고 있다(물론 나도 그 공모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러니 생존의 위협 앞에서 잔뜩 주눅 들어 개성과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있는 풍경이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게 보이는 것이다.
내가 7년간 몸담았던 FILM2.0만 해도 지난 3월 이후 발행된 11번의 주간지에서 한국영화 출연배우가 표지 모델로 등장한 횟수는 단 3회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 '비'가 한번 나오긴 했으나 그는 할리우드 영화 <스피드 레이서>의 배우 자격으로 포즈를 취한 것일 뿐이고, 나머지는 <천일의 스캔들><연의 황후><아이언 맨><인디애나 존스> <라스베거스에서만 생길 수 있는 일> 등의 배우들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런 사정은 '대한민국 영화주간지의 표준'을 자처하는 씨네 21도 크게 다르지 않다. 90년대 중반 창간했을 때만 해도 고집스럽게 한국영화 배우들을 표지 인물로 내세웠던 이 잡지의 전통 역시 시나브로 사라졌다.
이런 정황은 영화주간지에서 표지로 내세울만한 한국영화 배우가 없다는 얘기이고, 그만큼 시장에서 한국영화가 죽을 쑤고 있다는 반증으로 읽힌다. 필연적으로 대중 잡지는 독자들의 관심 방향과 시장의 트렌드를 좇을 수밖에 없으니,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과 수요를 넘어 공급 자체가 급감한 상황에선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한국영화 사랑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로선, 이런 상황이 썩 씁쓸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다만, 영화 매체의 존재 이유와 관련해 다른 차원의 씁쓸함을 감추기 어렵다. 지난주 지하철 가판대에는 쌍둥이 인디애나 존스가 나란히 걸렸다. FILM2.0과 씨네21 모두 해리슨 포드를 표지 인물로 내세운 것인데, 문제는 두 표지 모두 해리슨 포드가 입은 옷과 포즈가 거의 유사하다는 점이다. 영화사에서 제공받은 사진을 썼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 매체가 거의 완전히 영화 자본에 포획됐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오늘날 영화 잡지의 표지는 거의 광고판과 같은 취급을 당한다. 영화사가 광고 게재를 대가로 표지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생존 자체가 절박해진 주간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인디애나 존스>는 동시에 두 잡지의 표지를 공략(?)할 경우, 노출 효과가 훨씬 클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홍보 효과는 배가됐을지 모르나, 두 주간지의 개성은 사라졌다. 독점을 향한 자본의 욕망은 늘 이렇게 다양한 개성을 죽이는 방향으로 운동하기 마련이다.
이게 어디 할리우드 영화 뿐이랴. 이번호 두 주간지에는 신작 <님은 먼 곳에> 개봉을 앞둔 이준익 감독의 인터뷰가 나란히 실렸다(얼마전 나는 그가 인터뷰 요청을 해왔다며 토크2.1로 다뤄달라는 FILM2.0의 요청을 정중히 사양했다. 인터뷰는 편집적 필요에 의해 기자가 요청하는 것이고 취재원이 수락하는 게 정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충무로에선 이 반대의 경우도 자주 벌어진다). 게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봉준호와 최동훈의 신작 얘기가 각각 특집과 기획으로 다뤄졌다. 두 매체의 관심사가 우연찮게도 동시에 똑같아서 이런 일이 벌어진걸까?
전통적으로 영화 주간지들은 한국 영화산업의 동반자와 같은 대우를 받아 왔다. 한국영화의 전성기와 영화 주간지들의 전성기가 병행돼 온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영화 매체 기자 출신 가운데는 스스로 영화판에 입문한 경우도 꽤 된다. 스스로를 광의의 '영화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내 스스로 영화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건 정치부 기자가 정치인이 아닌 이치와 같다). 그러나 그 대가로 오늘날의 영화 주간지들은 날로 위세를 더해가는 영화 자본의 홍보 대행업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취급을 당하고 있다. 동반자로서가 아닌, 비판적 견제자로서의 위상을 다지지 못한 필연적 대가다. 오타쿠적 감성을 좇다 저널리즘을 홀대한 대가다.
주간지 시장의 열악함만을 탓할 일도 아니다. 겉으로는 대중지를 지향하는 포즈를 취하면서 홍보 대행을 수행하고, 한편으로는 흔들리는 정체성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더욱 영화 근본주의적 도그마에 빠져 있는 게 작금의 영화 주간지들이 처해 있는 풍경이다. 대중 매체의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동시대성과 사회성의 맥락을 놓친 것도 그 많던 영화주간지 독자들을 휘발시킨 결과로 이어진 것이라고, 나는 본다. 초창기의 씨네21에서 영화라는 문화적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웠던 독자들은, 극소수 문화 엘리트들만을 위한 배타적 취향의 향연장이 되다시피 한 '그들만의 리그'를 달가워하지 않게 됐다.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법론을 구사해온 FILM2.0은 가격 경쟁력 하나로 처연하게 버티고 있다(물론 나도 그 공모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러니 생존의 위협 앞에서 잔뜩 주눅 들어 개성과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있는 풍경이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게 보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