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에 해당되는 글 14건
-
2008/04/27
쾌변 녹음 현장
(3)
-
2008/04/26
원형보존 신공
(2)
-
2008/04/26
조명의 힘
(2)
-
2008/04/23
가끔 운다
(2)
-
2008/04/22
내가 불심검문에 절대 응하지 않는 이유
(5)
-
2008/04/20
반말과 존댓말
(2)
-
2008/04/16
방송에서 말하기의 위선성
(7)
-
2008/04/13
벚꽃의 저주
-
2008/04/12
5월에는 전주에 가자!
(2)
-
2008/04/09
투표율 19%, 20대 유권자의 정치적 자살
(7)
-
2008/04/07
야심과 성찰의 처세학
(4)
-
2008/04/04
투병(?) 일기 2
(6)
-
2008/04/03
이상하고 재미 있는 병원
(3)
-
2008/04/03
What Goes On by Velvet Underground
남들은 시원하다지만 뭔가를 씹어댄다는 것은 짱구를 무진장 많이 굴려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다. 떼구르르르~녹음에 돌입하기에 앞서 짱구 굴리는 소리가 스테레오로 들리는 듯한 사뭇 심각한 녹음실 풍경이다.
오디언닷컴에서 스폰서하는 '쾌변'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한 지 두 달이 넘어섰다. '독설'이라는 방법론이 익숙하지 않은, 한국의 대중문화 지평 안에서 뭔가 새로운 걸 건져보겠다고 호기롭게 나섰지만, 늘 능력의 한계에 봉착한다. 독설의 대상이 된 자와의 관계보다, 나는 이른바 '대중'이라는 실체 모호한 권력과의 타협 또는 싸움에서 어떤 전선을 형성할 것인가 정답을 내지 못한 채 주춤거린다. 그래서 나나 김태훈씨나 늘 어버버버다.
한가지 흥미로운 발견은 청취자들이 마녀 사냥을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김태희, 소녀시대, 이효리 등 누군가를 콕 찝어 씹어대니, 청취율이 많이 올랐다. 반면, 리얼리티 쇼나 개그맨 전성시대 등 '현상'을 진단하는 주제에 대해선 뜨뜨미지근한 반응이 돌아왔다. 얼마전 YTN 돌발영상 임장혁 피디를 만나 인터뷰했을 때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욕하기 쉬운 사람을 다루면 주목도가 올라간다"고. 우리 사회에 그만큼 저주와 증오가 넘실댄다는 얘기일지도 모른다.
설령 '쾌변'이 마녀 사냥의 심리학에 편승한 방송일지라도 나는 마녀만 죽기를 바라지 않는 심정으로 방송을 한다. 마녀를 양산한 시스템과 더불어 배후의 권력은 보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마녀를 향해 "죽여 죽여" 외치는 대중의 타깃 없는 증오도 함께 불타 죽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효과적으로 드러내야 하는데, 먹물끼를 빼고 소통할 수 있는 방법론은 늘 나에게 골치 아픈 숙제다. 그래서 그 하찮은 농담 따먹기 하기 전에도 저리 심각하다는 것, 누군가가 알아봐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치사한 바람일까?
Posted by cinemAgora
트랙백 주소 :: http://cinemagora.tistory.com/trackback/256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일이다. 동사무소에서 라면을 나눠준다기에 어머니가 나를 보냈다. 우리 집이 생활보호대상 가구였기 때문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참 기분이 언짢았다. 여튼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으니 라면 한 상자가 어디인가, 싶어 갔다가 자존심을 왕창 구기고 말았다. 신수 좋은 분들이 몇 오셔서 어려운 이웃에게 좋은 일 한답시고 사진 찍고 난리였는데, 내가 어려서였는지 꽤 불쌍해 보이는 사진 모델로 안성맞춤이었나 보다. 라면 박스를 받는 시늉을 한 채 사진 몇 장을 찍은 뒤에야 겨우 하나 얻어 들고 왔다.
여하튼 그래서 그 겨울, 하루에 한 끼니 정도는 라면을 끓여 먹었다. 연탄불 위에서 펄펄 끓는 물에 라면을 반으로 툭 쪼개 넣고는 분말 스프를 넣는 게 공식처럼 돼 있었는데, 하도 라면만 먹다 보니 그런 조리법이 왠지 지루해졌다. 해서 어느날 실험 삼아 면을 쪼개지 않은 상태로 넣고 그대로 끓여 봤다. 다 끊인 뒤에도 라면 면발이 넣었던 상태 그대로 남은 것이 신기해도 보이고, 또 그것이 재료의 신선함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 고급 요리의 레시피를 닮은 듯도 해 스스로 뿌듯했다. 더 뿌듯했던 것은 그렇게 끊였더니 라면이 더 맛있다는 발견이었다. 나는 이것을 '원형보존신공'이라고 명명하고 종종 이런 방식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이건 나중에 터득한 것인데, 원형보존신공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계란을 넣는 시점과 방법이다. 라면이 다 익기 약 1분 전에 노른자가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면발 위에 살짝 계란을 얹어 놓는다. 그리곤 거의 반숙의 상태로 라면을 완성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먹을 때 최대한 면발의 원형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 조심 주변부부터 면발을 들어 올린다. 그리곤 훅 한번 입김을 불어 면발의 온도를 낮춘 뒤, 그 면발 그대로 후루룩 한 입에 먹어야 한다. 꼬들꼬들한 면발 위에 물컹한 계란 노른자가 슬쩍 묻어 올라오는 맛이 일품이다. 끝까지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 먹고 나면 왠지 모를 성취감마저 생긴다.
별 이상한데 신경 쓴다 해도 할 수 없다. 당시로선 라면 상자 얻어오면서 다쳤던 자존심을 치유하기 위한 나름의 방식이었는데, 이게 꽤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라면 끓이기에 장인적인 정성을 쏟아 붓는 그 순간만큼은 라면과 내가 마치 혼연일체가 되는 느낌이 들면서 어떤 경지에 오른 듯한 착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물아일체가 아니라 그야말로 면아일체였던 셈이다. 조금 거창하지만, 이 원형보존신공을 통해 나는 어떤 지랄 맞은 상황에도 다치거나 변하지 않는 자신을 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일요일 점심 메뉴가 마땅치 않으면 한번 해드셔 보시라. 원형보존신공 라면!, 생각 보다 삼삼하다.
Posted by cinemAgora
트랙백 주소 :: http://cinemagora.tistory.com/trackback/255
Posted by cinemAgora
트랙백 주소 :: http://cinemagora.tistory.com/trackback/257
빙신 같은 남성성이 소매자락 여매여 눈물을 훔친다.
모질게 흘리면 될 눈물인데.
그래도 꾸역 꾸역 운다
울면 속이 시원할까봐.
시원하지 않은 울음.
허허롭고 막막한 가슴에서 가스 새오나오듯 나오는 눈물.
피식 피식 흐르다 말다.
요동치는 응어리.
시원하게 가래 뱉듯 퇘 뱉으면 될 것을
여인의 삶이 가엾어서 실컷 울 수 없다.
운명에 갇혀 지지리 복도 없었던 년,
1931년생 여인네의 삶이 가엾어서.
그래서 또 찔금 흘리다 자라다 만 철쭉 보고 허허 하며 웃는다.
오늘도 그렇게 치사하게.
자라다 만 나의 나를 보고 웃다 운다.
울다 운다.
어머니...
Posted by cinemAgora
트랙백 주소 :: http://cinemagora.tistory.com/trackback/254
가끔 지하철 역에서 불심검문을 당할 때가 있다. 의경이 경례를 붙여 올리면서 다가온다.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일단 멈춘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보여주지 않고 반문한다. "제가 불심검문에 응하지 않을 권리가 있죠?" 의경은 당황한다. "네, 권리는 있지만 협조해주시죠." 끝까지 개긴다. "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가도 되죠?"
대체로 불심검문에 위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해 왔지만, 가끔 독한 의경을 만날 때가 있다. 한 경찰이 검문에 응하지 않고 갈길을 가는 나를 쫓아와 팔을 잡은 적이 있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화를 냈다. "경찰이 내 몸에 손을 댈 권리가 있나요?" 의경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에 떼며 복수하듯 쏘아 붙였다. "좋아요. 그냥 가시는데, 권리 권리 하지 말고 국민으로서의 의무도 좀 생각해 보세요." 나는 어이 없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경찰이 나한테 훈계할 권리 있나요?"
진짜 그렇다. 세금을 내도 내가 더 많이 냈는데, 새파란 의경이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운운한다. 병역의 의무까지 꼭꼭 채우고 나온데다 해마다 예비군, 민방위까지 충실히 수행한 나에게. 때려 주고 싶었으나 공무집행방해죄로 쇠고랑 차기는 싫어 인내심을 발휘했다.
사실 내가 불심검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학 때 경찰의 불법적 검문에 낚여 헌법상 보장된 신체의 자유를 강탈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로만 듣던 콩밥까지 먹었다. 시위 현장에 대학생 신분으로 지나갔고 가방 안에 사회과학 서적이 있었다는 게 이유의 전부였다.
그 이후로 나는 대한민국의 공권력을 신뢰하지 못하게 됐다. 그러니 검문에 응하지 않고 건방 떠는 나같은 시민들을 그들도 감수할 필요가 있다. 그건 불합리해도 한참 불합리했던 과거에 대한 현재의 응징이므로. 파르르 떨며 불량 시민에게 분노를 표현했던 그 의경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도 이런 맥락을 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추격자>가 공권력을 한껏 조롱하는 걸 통쾌하게 바라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Posted by cinemAgora
트랙백 주소 :: http://cinemagora.tistory.com/trackback/253
조상님들께는 죄송스러운 얘기지만, 나는 한국어가 참 불편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적응할만 하면 바뀌는 맞춤법도 그렇거니와, 가장 결정적으로 반말과 존댓말이 나뉘어져 있는 이중의 언어 체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반말을 쓰느냐, 존댓말을 쓰느냐는 말을 하는 대상과의 관계를 상징하거나 말하는 대상에 대한 스스로의 태도를 규정한다. 이를테면 사회 생활을 하다 알게 된 어떤 사람과 존댓말을 쓰다가 반말을 쓰게 된다는 건, 그와 스스럼 없이 친해졌다는 얘기가 된다. 대체로 술자리를 빙자해 선언되는 "말 놓자"는 "이제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내자"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인지 어딜 가나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어김 없이 반말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반말을 쓴다는 건 그러나, 존댓말보다 격의 없고 편해서가 아니라, 존댓말이라는 대화 체계에 대한 일종의 합의적 거부의 성격이 짙다. 그 합의를 통해 양자간에 존재해온 무언의 벽을 없앴다는 일종의 상징 의례인 셈이다.
직장 사회나 군대 등 위계가 있는 어떤 조직이든 반말은 권력의 언어이기도 하다. 상급자나 연장자는 하급자나 나이가 어린 이들에게 반말을 하는 게 당연시된다. 반면, 그 반대의 경우라면 큰 일이 벌어진다. 다 때려치우고 나가겠다고 마음 먹지 않은 이상, 윗사람에게 반말을 한다는 건 배은망덕한 짓을 떠나, 정신 나간 사람이 되는 지름길이다.
누군가를 반말로 대할 것이냐, 존댓말로 대할 것이냐를 고민하게 된다는 것 자체가 한국어의 언어 체계가 대단히 정치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상대방과의 심리적 거리와 정치적 역학 관계를 늘 재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이며, 그 측정된 거리감에 의해 언어 체계를 택일해야 한다는 일상의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거꾸로 반말이나 존댓말의 사용이 대상과의 관계를 각각의 권력적 속성으로 규정해 버릴 때도 많다. 잘 모르는 누군가가 다짜고짜 나에게 반말을 해온다면, 불쾌감이 드는 한편, 왠지 그와의 권력 관계에서 피지배자로 밀려났다는 순간적인 위화감이 생긴다.
얼마전 시내에 차를 몰고 나갔는데, 직진 차선이 꽉 막히는 바람에 차들이 유턴 차선을 가로막자 신경질적으로 클락숀을 눌러 대던 한 성질 급한 운전자가 소리쳤다. "야이, 새끼들아, 제발 집에 좀 가자!" 그가 생면부지의 동료 시민들에게 욕설에 반말까지 했다는 건 예의를 갖추지 않겠다는 뜻을 넘어 그 상황 속에서 위협적인 권력자로 군림해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었다. 과연, 유턴 차선을 가로막은 차들은 슬금슬금 옆 차선으로 끼어들어 비켜주거나 그냥 직진을 포기하고 유턴을 해버리는 쪽을 택했다. 그가 만약 "앞의 차들 좀 비켜주세요." 했다면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이런 풍경들을 바라보며, 나는 늘 한국어에서 존댓말이나 반말로 나뉘어져 있는 체계가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중국어나 영어처럼, 예의를 갖추는 몇몇 상투어를 제외하고, 반말과 존댓말 어미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사람들이 서로를 좀더 평등하게 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쉽게 반말을 씀으로써 격식 없는 사이가 된 듯한 관계의 위선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당장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또 내가 가급적 실천하려고 하는 방식은,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쓰는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반말을 쓴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므로 심리적 저항이 적은 존댓말을 택하는 것이다. 가족, 학교 등 1,2차 집단의 구성원을 제외하고, 사회에서 만나 알게 된 거의 모든 분들에게는 나이가 많든 적든 가능하면 존댓말을 하려고 한다.
이렇게 하니까 몇몇 분들은 거리감이 느껴져서 싫다고 한다. "아, 선배, 저한테 언제까지 말 안 놓으실 거예요, 제가 불편해요." 이런 얘기를 많이 듣는다. 이 경우에 존댓말이 거리감을 강제하는 걸림돌이 됐다는 건데, 실질적인 대화의 내용으로 그런 거리감은 충분히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꼭 반말을 쓰지 않더라도 충분히 격의 없는 사이는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갖추겠다는 의지가 거리감을 만든다는 건 더 이상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Posted by cinemAgora
트랙백 주소 :: http://cinemagora.tistory.com/trackback/252
이번주 녹음한 '쾌변'의 '언틸다잉붕가붕가' 주제는 이효리였다. 이효리가 핑클 출신이라는 걸 동기 삼아 여러 걸그룹 멤버들의 명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내가 특정 걸그룹을 일컬어 "텐푸로 룸살롱 컨셉"이라는 표현을 썼다. 녹음이 끝나고 그 표현에 대해서 제작진과 출연진 사이에 약간의 논쟁이 오갔는데, 이른바 '미아리복스' 사건이 거론되며 이 역시 위험 수위의 발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발언의 당사자인 나는 슬쩍 억울했지만 비겁한 나는 그 자기 검열 결과에 동의하고 말았다.
곱씹어 보니 이 정도 발언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에서 이른바 '섹시함'을 내세우는 대중 문화 아이콘을 비평할 때 어떤 다른 수사가 허용될 수 있을까 답답증이 몰려 왔다. '관음증적 혹은 도착적 시선을 유발하는' 따위의 먹물적 표현 외에 자유롭게 동원할 수 있는 독설의 어휘는 여러모로 협소하기 짝이 없다. 사실이 그렇다. 앞선 '텐푸로 룸살롱' 발언만 해도 그냥 밀고 나갔다면 굳이 접대부 여성과 빗대는 바람에 여성들의 불쾌감을 유발했네, 특정 연예인을 모욕했네, 등등의 말들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사실 한국 사회에선 대놓고 누군가를 원색적인 표현을 동원하며 비판하는 건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다. 칭찬이 미덕이고 특정인에 대한 비난은 박명수의 영악한 전략대로 '농담의 범주'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 인터넷에선 누군가를 욕하고 돌팔매하기 좋은 기회가 오면 우르르 몰려들어 열심히 씹어대는 광경을 자주 본다. 참으로 모순적인 풍경 아닌가. 그러니 뒷담화 욕망을 주류 매체의 공식적인 자리로 끄집어내 신랄함으로 소비하는 건 요원한 일일 것 같다. 거칠게 말해, 한국의 공식적 담론 시스템, 특히 공중파 방송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위선의 상호 부조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야 사회가 아름다워진다나 뭐라나.
얼마전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 나와 공수창 감독의 영화 <GP 506>을 소개하게 됐는데, 이 영화가 호러의 틀을 빌어 군대 사회의 폐쇄성과 경직성을 비판하고 있다는 골자의 얘기를 했다. 나는 거기에 "물론 병역의 의무는 신성한 것이긴 합니다만..."이라는 전제를 약삭 빠르게 달았다. 공중파 방송에서 병역의 의무가 가진 불합리성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이 역풍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에 의한 무의식적인 방어 기제가 자기 검열적 발언으로 이어진 셈이었으니, 스스로도 부끄러웠다. 제기랄, 이 사회에서 제발로 군대 가고 싶어하는 이들이 도대체 얼마나 되냐고...그 생각을 끝내 입밖에 내지 못하는 것이다.
주류 방송에서 제도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엄숙주의를 거스르는 발언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병역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냐고 말하거나 특정 걸그룹을 일컬어 '섹시미'라는 실체 모호한 상투어 대신 대한민국의 적지 않은 성인 남성들이 그 어감을 알고 있는 '룸살롱 컨셉'이라는 구체적 단어를 인용해 적시해선 안되는 게 현실이다.
대중 문화 아이콘이 지닌 기의를 비판하려는 의도는 해당 인격체를 모욕하는 것과 동일시된다. 익명의 악플에는 흔쾌히 동네북이 되지만, 실명 대 실명의 독설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건 치명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미아리복스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결국 베이비복스가 패배하지 않았던가. 한국사회가 집단적이고 관계 지향적 속성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비판의 대상들이 그만큼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방송에서 정기적으로 말을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위선적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얼굴에 철판 깔고 눈 딱 감고 예수가 잡혀가던 밤의 베드로가 되면 먹거리가 보장된다. 위선의 상호 부조에 동참하면 안전이 보장된다. 나도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Posted by cinemAgora
트랙백 주소 :: http://cinemagora.tistory.com/trackback/250
젠장, 난 이제부터 벚꽃을 증오하기로 했다. 4월 천하산천에 다 피어 있는 그 벚꽃 때문에 일주일 내내 고생했기 때문이다. 지난 화요일엔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윤중로 벚꽃 인파에 밀려 일 때문에 갔던 여의도를 빠져 나오는데만 1시간 가까이 걸렸다. 윤중로가 만원이니 사람들이 집 근처 호수 공원으로 밀려 들었다. 어제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차를 몰고 나갔다가 딱 갇혀 또 한 시간을 도로 위에 버렸다. 오늘은 어머니 병원에 가기 위해 외곽순환도로를 탔다. 인천대공원에서 벚꽃 축제를 한단다. 아니나 다를까, 도로가 주차장이다. 대한민국 사람들, 지금 벚꽃에 미쳤다. 단단히 미쳤다.
벚꽃, 물론 예쁜 꽃이다. 피어 있을 때보다 질 때 더 예쁘다. 예뻐서 여기 저기 다 심었다. 최근 몇 년 동안의 일이다. 너도 나도 과시성 영화제 열 정도로 독창성 없는 우리나라 지자체들, 벚꽃 때문에 여의도가 들썩인다 싶으니 앞다퉈 심어 높고 축제 연다. 해서 요즘엔 동네 어귀에도 벚꽃은 핀다. 그 꽃도 예쁜데, 굳이 사람들 모이는데 가서 꽃향기에 취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많다. 우르르 몰려 다닌다. 대한민국에선 낭만도 '집단 낭만'이다.
젠장, 난 이제부터 벚꽃을 증오하기로 했다. 도로를 가득 메운 그 낭만 행렬에 밀려 편찮은 어머니 끼니를 못 드렸다. 지랄 맞은 벚꽃이 엿 같아 보인다.
Posted by cinemAgora
트랙백 주소 :: http://cinemagora.tistory.com/trackback/249

칸국제영화제 메인상영관 앞
직업이 영화 기자인지라 국제 영화제를 여러 군데 다녔다. 같은 영화 축제라 할지라도 나라와 지역에 따라 분위기가 천차만별이다.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칸 국제영화제는 그야말로 '권위'로 똘똘 뭉친 나머지, 검은 색 턱시도 차림이 아니면 공식 시사에 들어갈 수 없다. 프레스 카드도 나라와 매체력에 따라 등급별로 나뉘어 있어 유명 스타라도 올라치면 아예 기자 회견장 접근 조차 불가능한 경우도 생긴다. 휴양지 바닷가는 먼발치로 시야에만 담아둔 채 숙소에서 행사장까지 전쟁 치르듯 오가야 했던데다 가지고 갔던 카메라까지 도둑 맞아서였는지 칸에 대한 필자의 기억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베니스영화제는 그야말로 지중해의 물과 태양이 빚어내는 이중창에 둘러 쌓인 듯한 낭만적 분위기를 자아내긴 하지만, 보름 내내 듣는 그 이중창은 참으로 지겨웠다. 늦겨울에 열리는 베를린영화제는 견고하고도 유서 깊은 도시의 이미지대로 어딘가 모르게 학구적이고 논쟁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데, 이 말은 그래서 별로 재미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밴쿠버 국제영화제 메인상영관 전경
이런저런 크고 작은 영화제를 다녀 봤지만, 필자가 가장 좋아한 영화제는 두 차례 다녀온 밴쿠버 국제영화제다. 가을이 한껏 무르익을 무렵인 9월 말 열리는 이 영화제는 살기 좋기로는 세계 최고로 꼽히는 도시의 세련된 안정감과 정취에 힘입어 북미 대륙의 가장 독특한 영화제로 자리를 잡고 있다.
사실 밴쿠버 영화제의 진짜 미덕은 영화제 분위기가 '오순도순'하다는 것이다. 한 두 블록 안에 모든 상영관이 밀집해 있어서 관객들은 거리에 즐비한 각종 바와 카페테리아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한가롭게 영화제를 즐긴다. 그렇다고 거리가 북적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극장 안에만 들어가면 객석이 빈자리 없이 거의 가득 들어차 있다. 축제의 시끌벅적함도 좋지만 새로운 영화 미학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밴쿠버는, 영화제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영화제를 열고 있다.
국내에서도 각종 영화제가 열린다. 가장 유명한 부산국제영화제는 권위와 규모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칸영화제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행사의 중심이 남포동에서 해운대로 옮겨 가면서 더욱 그런 색깔을 많이 띄고 있다.
5월에 열리는 전주국제영화제는 밴쿠버를 닮았다. 특히 '오순도순'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전북대 문화관이나 소리 문화의 전당과 같은 큰 상영관을 빼면 거의 대부분의 상영관이 고사동 일대에 오밀조밀 몰려 있다. 영화 한편을 보고 고사동 극장가를 거닐며 사람들의 표정을 구경하거나, 볕 좋은 곳에 걸쳐 앉아 커피 한잔 홀짝거리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고사동 영화의 거리
특히 전주는 맛집이 많아 좋다. 서로 다른 스타일의 콩나물 국밥을 맛볼 수 있는 '삼백집'과 '웽이집'은 필수 코스다. 고풍스럽고 정갈한 음식으로 소문난 한옥마을의 한정식집이나 놋그릇에 담겨 나오는 진짜 전주식 비빔밥은 또 어떤가. 전북대 정문 앞의 국수집도 빠뜨리면 후회할 곳이다.

'웽이집' 콩나물 국밥
전주영화제에선 무엇보다 부산영화제처럼 북적대는 인파의 소용돌이에 시달리지 않고도 비교적 여유롭고도 소박하게 영화와 각종 행사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숙제 해치우듯 전투적 눈빛으로 무장한 채 상영관들을 옮겨 다니는 것만이 영화제를 즐기는 방식의 전부는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올해도 나는 주저 없이 전주행 열차표를 예약했다. 매혹적인 영화들의 성찬과 침 꼴깍 넘어가는 음식들의 향연을 앞두고 슬슬 가슴이 부푼다.
*여행주간지 '트래비'에 기고한 글입니다.
Posted by cinemAgora
트랙백 주소 :: http://cinemagora.tistory.com/trackback/248
세상이 미쳐 돌아가면 예민한 젊은이들의 자살이 늘어난다. 폭압적이고도 불합리한 논리가 버젓이 판치고 폭력이 정당화되면 세상에서 희망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되면, 젊은 육체에서 치밀어 오르는 타는 열정과 세상의 차가운 모순 사이에는 치명적인 균열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결국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해 버린 그들은 쉽게 죽음을 택한다.
총선에서 20대 투표율이 20%를 밑돌았다고 한다. 진보를 논하는 이들은 젊은이들의 정치적 허무주의와 무관심을 통탄하지만, 나는 이것을 20대 유권자의 정치적 자살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물질주의의 집단 욕망이 만들어낸 거대한 신기루가 20대 젊은이들을 거세게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때이른 권태와 절망을 오가던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의지를 상실했다. 고로 자살해 버린 것이다.
음악이나 듣자. 달리 할 말이 없는 날이다.
Posted by cinemAgora
트랙백 주소 :: http://cinemagora.tistory.com/trackback/247
세상은 야심에 찬 인물들이 득세하게 돼 있다. 고인이 된 정주영 현대 전 회장마저 다시 CF에 나타나 새삼스레 설교하지 않던가. 아무리 얼토당토 않은 꿈일지라도 배포 하나면 세상을 주무를 수 있다고 말이다. 여전히, 조선소라는 실체 없이 차관 약속을 받아낸 그의 야심은 한국 자본주의의 신화다. 황금과 석유, 드넓은 땅에 대한 야심은 미국 자본주의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꿈을 크게 가져라'라는 말은 '꿈만 크게 가져라'라는 말과 동의어가 됐다. 야심 앞에서 실력과 성찰은 두번째 문제다. 'Boys! Be Ambitious'의 이데올로기를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은 오늘도 야심에 차 눈빛을 반짝인다. 총선을 앞둔 거리에서 그들의 눈빛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은 무기력한 호기심으로 그들을 주목한다.
그들이 어떤 내용과 어떤 알맹이를 지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야심은 자본주의의 윤활유이자 이윤 창출의 선지자들이 지녀야할 미덕! 고로 야심가는 주목 받으며, 주목 받은만큼 권력이 생긴다는 이치를, 그들은 훤히 꿰뚫고 있다. 찰라적 관심 거리를 찾는 미디어가 그들 야심가들의 편이라는 것까지. 어쩌면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가 실력 없는 야심가들의 소굴이 된 것도 당연지사다.
야심의 처세술은 곧잘 사람들을 기회주의자로 만든다. 야심에 걸맞는 실력을 갖췄는지 스스로 성찰하지 않은 채, 세상을 휘저으며 나대면 언젠가 기회가 올거라고 믿는다. 내 주변에도 이런 야심가들이 적지 않다. 세상이 날 몰라준다고 불평 불만을 일삼다가 저기다 싶으면 잽싸게 달라 붙는다. 깜냥도 안되는 꿈을 꾸다가 한숨 섞인 절망과 자기 기만을 오간다.
대개 고등 교육의 혜택을 누린 386 세대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증후군이다. 기성 세대의 악덕을 극복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과거는 자신의 균형 감각과 정의감이 식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을 때만 편리하게 활용된다. 그러나 원칙과 도덕은 곧잘 현실주의와 실용주의 앞에서 휴짓조각이 된다. 성찰이 결여된 야심주의자라는 면에서 그들 중 일부는 기성세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들은 그냥 새로운 시대의 부와 권력을 쥐고 싶을 뿐이다.
때론 야심과 성찰이 얼추 맞물리는 인물들도 있다. 이들은 성찰의 현실화를 위해 야심을 내세운다. 그러나, 혹은 그 때문에 앞서 언급한 알맹이 없는 야심주의자들의 적이 되기도 한다. 개 눈에는 개밖에 안보인다고 하던가. 알맹이가 없는 야심주의자들에게 알맹이가 있는 야심주의자는 똑같이 야심주의자로 보일 뿐이다. 성찰적 야심주의자는 고로 자신들의 먹잇감을 빼앗을 훼방꾼에 불과하다. 정권 교체와 총선이 어지럽게 맞물리면서 여기저기서 이런 대립이 보인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알맹이 없는 야심가들의 세상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어제의 거친 선동이 오늘의 세련된 허세로 바뀌었을 뿐이다.
오늘도 세상은 당신에게 한 수 가르친다. 출세하고 싶은가? 머뭇거리지 말고 과감하게 과장하고 허풍 떨어라. 뭔가 많이 아는 척 하라. 몰래 플랜 B를 만들어 놓고 열정을 다해 플랜 A에 올인할 것처럼 굴어라. 아직은 그게 먹힌다. 그런 사람들이 잘 먹고 산다.
Posted by cinemAgora
트랙백 주소 :: http://cinemagora.tistory.com/trackback/246
기왕 민망한 얘기 꺼낸 김에 조금 더 나가 볼까 합니다. 다름 아닌 '피부 비뇨기과' 통원 치료, 그 두번째 에피소드입니다. 앞선 글이 지나치게 민망했는지 아니면 어이가 없었는지 아무도 댓글을 안다셨더군요. 근데 오늘 이와 관련해 여러 얘기를 들었습니다. 대부분 '쿡쿡'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괜찮냐"고 물으시더군요. 총선 앞두고 갑갑해 하실 분들이 모처럼 한번 웃으셨다는데, 제 체면 하나 희생하는 것쯤이야, 라는 나름 살신성인의 기분으로 씁니다.
아침 댓바람부터 의사님 명령대로 다시 병원에 들렀습니다. 그다지 환자가 많지 않은 이 병원은 내원하면 채 1분도 기다릴 새 없이 바로 조치를 취해주더군요. 오늘은 의사님 뵐 필요도 없이 바로 처치실로 직행, 제가 먼저 바지를 끌어 내리고 알아서 난짝 엎드렸습니다. 두번째가 되니 저도 어느 정도 환자로서의 자세를 익힌 셈입니다만, 내심 간호사님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제 바지를 내리는 치욕만큼은 피해보자는 소심한 잔머리를 굴렸던 겁니다. 좀 있다가 멀리 의사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최광희씨 준비 됐나요?"
"지금 준비중입니당~"
하지만 장장 5분이 지나도록 의사님은 나타나지 않더이다. 처연하게 발라당 까진 제 엉덩이 위로 시골 아낙네처럼 넉넉한 인상을 가지신 간호사님만 꿈질꿈질 왔다 갔다 하십니다. 아뿔싸. 제 자발적 행동의 타이밍이 너무 빨랐던 겁니다. 그냥 기다릴걸...후회해도 때는 늦었습니다.
이윽고 의사님이 전광석화와도 같이 날랜 동작으로 처치실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곤 뜬금 없이 묻습니다.
"하고 왔어요?"
"네?"
"어제 준 물약으로 환부 씻고 오라고 했잖아요."
"아뇨...안했는데요...그게..."
"어허~ 이 환자 말 안듣는데? 아무래도 더 아프게 해야 겠구만."
"아뇨..그게 아니라...아아악~"
의사님은 제 자초지종을 들을 새도 없이 환부에 메스를 사정 없이 들이댔습니다. 심지어, 이번엔 마취주사도 안 놓고 말이죠. 사실 그 물약을 전달 받을 때만해도 간호사님은 일단 받아 놓으라고만 했을 뿐입니다. 하고 오라는 말은 듣지 못했던 전 억울함도 느낄 새 없이 밀려오는 환부의 고통으로 몸부림 칠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고통이 살짝 잦아든 사이, 억울함을 삭이지 못한 전 끝내 저항했습니다.
"그게요. 간호사님이 하고 오라는 말씀은 안하셨거든요."
"아, 그래요? 야~이거 이거 나도 이거 옛날에 걸려서 엄청 고생했잖아. 항문외과 알지. 이 간호사?"
"항외과요?"
"음음...항문외과 말이야. 거기서 째고 그러는데 아우 죽는줄 알았어."
이미 어제 했던 레파토리를 되풀이함으로써 슬쩍 화제를 돌린 의사님은 처치를 마친 뒤 환부에 레이저 쏘이라는 주문을 합니다. 상상도 못한 굴욕의 순간은 이때부터였습니다. 엉덩이 위에서 빨간 레이저가 내려 쪼이는데 환부가 잘 안보이니 엉덩이를 한 손으로 잡아 당기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의사님 왈,
"누가 잡아줄 수도 없고 환자분이 직접 잡고 있어야 겠네."
간호사님이 거듭니다.
"호호, 환자분 오늘 벌 좀 서셔야 겠넹."
이 대목에서 너무 생생하게 상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암튼 이런 자세로 엎드려 있어야 하는 상황이 영 스스로도 민망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의사님이 휘리릭 나가 버린 사이를 틈타 간호사님께 급히 물었습니다.
"이거 얼마나 이렇게 하고 있어야 해요?"
"20분!"
'네? 그렇게나 오래요?"
"아휴, 오래라니! 원래 기본 10분인데 제가 빨리 나으라고 보너스로 10분 더 넣어드린 겁니다."
네? 여기가 뭐 노래방도 아니고...그리고 저...이런 보너스 필요 없는데...
"잡고 있다가 팔이 힘들면 슬쩍 놓으세요. 그리고 잽싸게 다시 잡아요. 알았죠?"
점입가경, 설상가상일세.
이렇게 하여 저의 굴욕적 투병 생활의 제 2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만, 이런 치욕의 나날이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기약할 수 없다는 게 슬슬 갑갑해 집니다. 어제 의사님이 "2~3주 고생해야 할 걸요."라고 했던 말이 불안하게 머리 속을 맴돌 뿐입니다.
Posted by cinemAgora
트랙백 주소 :: http://cinemagora.tistory.com/trackback/245
오늘은 약간 부끄럽고 지저분하지만 나름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혼자만 쿡쿡 대고 있자니 너무 아까운 일을 겪어서요.
민망하게도, 최근 제 엉덩이에 종기 같은 게 생겼습니다. 별로 아프지도 않아서 왠만하면 알아서 사라지겠지 싶어서 두세 주 놔두었는데, 요놈이 점점 커져서 생활하는데 불편할 정도가 됐습니다. 그렇다고 병원을 찾는 걸 주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종기가 하필 항문 쪽에 매우 가까운 부위에 났기 때문입니다. 암튼 참다 참다 오늘 결국 눈 딱 감고 동네 병원에 갔습니다.
일단 집에서 가까운 피부과를 찾았는데요. 대부분 에스테틱 어쩌고 주로 미용적 목적을 내세우고 있어서 영 내키지가 않더군요. 생각을 해보세요. 평소 주로 얼굴 잡티 제거에 골몰하는 의사님께 엉덩이를 까고 민망한 부위를 보여주게 될 시추에이션이 영 매칭이 안되더라고요.
해서 거리를 좀 해멨습니다. 그랬더니 한 간판이 시야에 들어오더군요. '피부비뇨기과.' '피부과와 비뇨기과를 같이 한다 이거지. 그러면 그 부위의 피부에도 일가견이 있을테고, 또 의사님이 일상적으로 그 부위를 보신다는 얘기 되렸다?' 대충 이렇게 짱구가 돌아간 겁니다.
과감히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두 분의 간호사님이 계신데, 두 분 다 인상이 영 시골 읍네 아낙들처럼 생기셨더군요. 흠...약간 불안해지는 순간, 벽에 걸린 의사 경력을 보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 출신학교를 나오셨더군요. 긴급 상황에선 학연을 좀 팔자, 라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나름 긴장감이 커졌습니다. 곧 의사님의 호명이 들렸습니다. 간호사도 아니고 의사가 직접 문을 열고 호명하는 드문 상황도 괜시리 불안감을 증폭시키더군요.
여차저차 병증을 말씀드렸더니 진료실 문도 닫지 않고 대뜸 바지를 내리라시더군요. 어떡합니까. 시키는대로 문 밖의 시선을 살피며 무릎까지 바지와 속옷을 내린 채 민망한 부위를 보여드렸습니다. 손을 넣어 스윽 환부를 만지신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의사님은, 곧 회심의 표정을 지으며 첫 마디를 던지더군요, "고생 좀 하셔야겠습니다. 2~3주 고생할 각오 하셔야겠네요." 헉! 네? 종기 하나 가지고 2~3주나? "일단 째야 합니다." 그리고는 전광석화처럼 간호사를 향해 외칩니다. "미스리~매스 준비해줘요. 수술 들어가야 하니까." 수술이라고? 매스라는 말에 화들짝. 평생 몸에 칼 한번 댄적 없는 제가 민망한 부위의 종기 때문에 칼을 받아들여야 하는 신세가 된 데 일단 침울. 허나 의사님은 모처럼 외과적 시술을 하게 됐다는 사실에 살짝 흥분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들 들을만한 소리로 나누는 대화, "항문 옆의 종기를 들어내야 하니까..." "네, 항문 옆의 종기!" 이분들...뭐 하자는겁니까, 지금!
거기까지야 그렇다 쳐도, 그 순간부터 의사님과 간호사님들의 태도가 절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환자를 안심시켜 주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의사님은 수술실로 들어가는 제 뒤통수에 대고 "고생 좀 하겠어"를 연발하고, 시골 아낙네가 연상되는 간호사님은 수술대 위에 난짝 엎드린 제 바지와 속옷을 일말의 주저함 없는 과감한 액션으로 무릎 아래까지 내리시고는 "거 참 하필 고놈의 뾰로지가 거기 날 게 뭐람" 하시며 "낄낄낄" 웃는 겁니다. 그리고는 "아파요?" 하고 묻고는, "별로 아프지는 않아요." 했더니 "앞으론 많이 아플걸요?" 합니다. 그리곤 결정적으로 "아예 바지 다리 하나를 다 벗어요. 다리를 벌려야 하니까." 그러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급굴욕. 뒤이어 수술 과정에서 이어진 의사님과 간호사님의 대화는 절 더욱 경악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아우 깊다. 깊어. 이거 지금 빼내야지, 안그러면 치루에 걸려요. 그러면 항문외과 가서 직살나게 고생해야 되는거지. 차라리 지금 고생하는 게 나아요. 나도 옛날에 이거 걸려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선생님두요?"
"그럼, 스트레스 받고 술 퍼마시다 딱 걸린거지. 비뇨기과 의사가 그런 거 걸려서 항문외과 다닌거지. 하하하."
"마취 주사 놓습니다. 살짝 아플거예요."
"엄살 부리지 마세요. 마취 주사 놨으니까 하나도 안플거야."
안아프긴! 환부에 통증이 몰려 온다고. 윽!
"어허, 이 정도 가지고 엄살은. 야 이 환자 나중에 드레싱 할 때 엄청 아플거야."
"그러게요. 저번 환자도 드레싱 할 때 나 죽네 하던데요. 호홋."
"흐흐흐. 그 때가 진짜 아프지. 지금은 약과야. 흐흐흐."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네? 남의 엉덩이를 발랑 까 놓고 의사와 간호사님이 대충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거였습니다. 어이도 없고, 한편으로는 재미있기도 하더군요. 수술 이후 대충 바지를 수습하고 나서는데 의사님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더 거드십니다. "제가 고생한다면 고생하시는 겁니다." 그러게, 제가 뭐라 했습니까? 왜 자꾸 겁을 주시는건가요? 묻고 싶어지더군요.
병원을 나서는데, 일본소설 '공중그네'의 이라부 센세가 떠오릅디다. 어떤 환자든 주사를 놓고 싶어서 환장하던 그 괴짜 의사 말이죠. 이분도 환자에게 살짝 가학적 협박을 가하는 걸 은근히 즐겨 하시는 것 같다는 데 생각이 미치니 갑자기 폭소가 터졌습니다. 그 은근짜한 말투의 간호사님들은 또 어떻고요. 항생제 주사 맞은 자리가 욱신대는데 낄낄 거리며 집까지 왔습니다. 세상 살다 보니 재미있는 일도 많습니다. "고생 좀 할거야"라는 의사님, 내일 아침에 또 만나러 갑니다.
Posted by cinemAgora
트랙백 주소 :: http://cinemagora.tistory.com/trackback/244
Posted by cinemAgora
트랙백 주소 :: http://cinemagora.tistory.com/trackback/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