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자 생활을 8년째 하고 있지만, 한번도 영화 기자가 영화 평론가와 어떻게 다른 것이냐는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독자들 입장에서는 굳이 그게 중요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두 직업적 개념이 혼용돼 왔던 게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몇가지 사례로, 전 조선일보 기자 이동진 선배는 프리랜스 영화 기자이자 영화평론가이고 나와 한때 필름2.0에 함께 있었던 오동진 선배 역시 영화 평론가로 더 많이 불려진다. 김영진 선배(명지대 교수)는 씨네21 재직 시절부터 기자라기 보다는 사실상 영화 평론가로 불렸다.

저널리스트 선배들의 족적이 이러하다 보니 영화 매체 종사자들도 은연중에 이들 기자 출신 평론가들을 롤모델로 삼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러다 보니 팩트 위주의 르포 기사보다는 관점을 실은 비평적 아티클 쓰기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짙다. 말하자면 이들의 장래 희망은 저널리스트라기보다 평론가라는 생각이 든다.

쓸데 없이 직업적 자존심이 거대한 나는, 스스로 한번도 평론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부끄럽게도 영화평론가 협회 회원으로 가입돼 있긴 하지만). 그 생각은 프리랜스로 나온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나를 평론가라고 소개하면 수정해 드린다. 기자라고 하면 소속을 물을 게 뻔해 프리랜스 냄새가 많이 나는 '저널리스트'라는 구차한 단어를 선택한 것이 가끔 스스로도 아쉽지만, 어쨌든 영화 글쓰기를 업으로 삼았다는 이유로 평론가를 사칭하고 싶지는 않다.

결코 기자가 평론가보다 상위의 개념이라는 어쭙잖은 우월 의식 때문이 아니다. 평론의 전문성과 특수성이 분명히 존중 받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평론가라는 직함을 붙이기 위해선 적어도 석사 학위 이상의 전공 기간을 거쳤거나 그에 준하는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믿는다. 영화 주간지나 매체에서 일한 걸 토대로 평론가라면 대한민국엔 평론가라 할만한 이가 족히 수 백 명은 될 것이다. 개나 소나 평론가라면 진짜 평론가들을 모욕하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영화 기자라는 직함을 고수하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평론가라는 호칭이 남발되는 현상에 대한 반발심도 작용한 것 같다. 그 현상의 이면에 평론가는 영화 기자보다 한 단계 앞선 개념이라는 무의식이 뒤따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딴에는 맞는 얘기다. 영화를 비평적으로 접근하는 면에 있어서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전달의 메커니즘까지 신경써야 하는 기자가 영화 미학 그 자체에 천착해 있는 평론가를 따를 수 없다.

그러나 두 직업 사이에는 분명히 고유의 영역과 각자의 전문성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를테면, 기자는 영화 산업 내부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흐름에 관심을 갖는다. 박스오피스, 제작 인프라, 돈과 사람의 이동에 촉수를 들이댄다. 평론가가 감독의 연출 스타일에 초점을 맞춘다면, 기자는 감독 뿐 아니라 배우의 연기 패턴과 미술, 음악 쪽 종사자들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좇는다.

말하자면 평론가는 자신의 세계관에 입각해 영화를 해석하고 관점을 제시하는 직업이다. 영화 기자는 하나의 영화를 둘러싼 무수한 사실을 수집하고, 그 가운데 관객들에게 유의미한 재료들을 제시하는 직업이다. 영화 기자는 또한 시의적으로나 비평적으로 마땅히 주목받아야 할 영화를 취사 선택해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다룰 것인가를 결정하는 '에디터'로서의 역할도 한다. 평론가와 영화 기자의 영역은 영화 산업이 발달할 수록 더욱 분명하게 전문화되어야 하는 서로 다른 영역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기자는 비평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영화 평론가가 가끔 스탭들을 만나 인터뷰할 수 있듯, 기자도 비평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런 크로스오버 현상은 예로부터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방법론이 달라야 한다고 믿는다. 경향적으로 저널 비평은 관객이 어떤 영화를 볼 것이냐 말 것이냐를 선택하는 재료를 제공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기자의 비평은 그러므로 '프리뷰'에 가깝다. 평론가들의 비평은 비교적 훈련된 인문적 교양을 바탕으로 어떤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이냐의 관점과 시각을 제시함으로써 관객들이 더욱 풍성하고 다양한 각도로 영화를 향유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평론가의 비평은 그러므로 '리뷰'에 가깝다.

그런데 요즘엔 기자들이 리뷰도 쓰고, 평론가들이 프리뷰도 쓴다. 마구 혼용돼 있다. 그러다 보니 객관을 가장한 주관적 글쓰기와 주관을 앞세웠으나 줏대 없는 글쓰기도 보인다. 어차피 영화 비평에 객관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나'를 분명히 드러내야 하는데 기자들은 습관적으로 '나'를 가리면서 가끔 설익은 자신의 관점을 객관적인 것인양 들이댄다. 그럴 바엔 아예 열 명의 평론가들을 인터뷰해 관점을 나열해 주는 게 더 객관적이다. 더 나은 방법은, 비평을 아예 평론가들에게 맡겨 버리는 것인데, 원고료 부담을 줄이려는 매체들의 편의적 선택이 기자들을 설익은 평론가로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기자와 평론가가 혼용되면 좀 어떠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겠다. 사실 대수는 아니다. 그러나 관점은 홍수처럼 늘어나는데, 깊이 파고드는 취재력의 결과물은 점점 희박해져가는 것 같아 하는 소리다. 영화 기자도 저널리스트라면, 비평적 방법론 말고 우선 저널적 방법론부터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이는 물론 내 스스로에게도 함께 던지는 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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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주말에나 제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는 것 같습니다. 평일에는 이래저래 사변적 글쓰기를 할 정신적 여유가 생기지 않은 것도 이유이겠지만, 요즘엔 왠지 만사가 귀찮아지고 있습니다. 왜 그런건지...

주말을 틈타 산에 올라 모처럼 호연지기를 재충전하려 했는데, 궂은 날씨가 그마저 도와주질 않는군요.

어제는 서강대학교에서 열린 '21세기 한국영화의 재발명'이라는 주제의 영화인 포럼에 발제자로 참석했습니다. 현재의 위기 국면을 진단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국영화가 살길을 개척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놓고 무려 6시간이 넘게 (별로 격렬하지 않은) 토론이 오갔습니다만, 여전히 영화인들 사이에서 동상이몽이 뿌리 깊게 존재한다는 것을 재확인한 계기였습니다. 현장에선 못살겠다 아우성인데, 일부에선 뭐가 위기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한쪽에서 불합리한 유통 구조가 문제라고 하면 다른 한쪽에선 영화인들이 창의적이지 못한 게 진짜 문제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미학적 측면 외에는 영화 산업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학자들은 지금의 위기 상황에 대해 "좀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피상적인 진단을 내놓을 뿐입니다. 산업 주체들은 각자의 이해 관계에 매달려 동문서답을 일삼습니다. 그야말로 중구난방...답답증이 몰려 왔습니다.

작년 이 맘때쯤의 열의가 남아 있다면 아마 어제 포럼을 녹취해 블로그에 올렸을 듯 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럴 의욕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제가 올해 들어 겪고 있는 무기력증의 연장선일 겁니다.
 
생각해보니, 대선 후유증인 듯 싶습니다. 이 정권의 도래를 예상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어떤 가치를 부여 잡고 살아야 할지 막막해진 것 같습니다. 노무현 정권을 좋아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부정이 새로운 미래의 창조가 아니라 대과거의 부활로 이어진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한없이 갑갑합니다. 승자 독식을 정당화하는 사이비 실용주의의 공기가 가슴 한켠을 억누릅니다.  

총선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며칠전 만난 모 교수님의 표현을 빌면 "정치를 종교의 반열에 올려 놓은 경상북도의 성모 마리아"를 노골적으로 내세운 정치 세력이 버젓이 목소리를 내고 있고, 꼴통 보수의 낡은 슬로건을 다시 내건 별 이상한 정당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습니다. 진보 진영은 분열의 골짜기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정치가 대수냐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대수입니다. 눈 감고 귀를 막아도 정치는 우리 삶과 직결된 문제이며, 어떤 계급의 이해가 내 삶을 내습할 수 있다는 현실적 위협입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는 수십억 부자들의 논리를 하달하기 위해 분주한 꼬락서니를 한 채 서민을 말하고 중산층을 팔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울한 겁니다.

이럴 때일 수록 문화 안에서 일말의 희망을 뽑아내는 게 그나마 제가 할 수 있는 일인 듯 싶습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에서 영화를 말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나 슬쩍 회의가 몰려오기 일쑤입니다.  희망의 가닥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비도 오고, 산에도 못갔으니 극장 안으로나 몸을 숨겨야 할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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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태국 여행에서 돌아온 지인이 자신의 디카에 찍힌 사진들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태국의 이국적 풍광보다 사람들의 표정이 더 많았다. 우리 돈으로 치면 단돈 몇 백 원에 가방이든 지갑 위에든 정말 멋진 그림을 그려주는 한 생활 예술가의 투박한 손과 얼굴, 버스에서 만난 교복 입은 학생들의 해 맑은 웃음을 보여주며 그 친구는 즐거워 했다.

사람들의 표정을 정성스럽게 담아온 그 사진들을 본 나는 한편으로는 슬쩍 착잡해 졌다. 이를테면, 우리가 유럽이나 미국의 관광 명소에 갔을 때 사람들의 표정을 주목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고풍스러운 건물이나 압도적인 자연 환경, 낭만적인 카페테리아의 정취에 취하다 보면 사람들이야 거기서 거기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유독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 가면 우리는 곧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떼로 몰려들어 구걸을 하는 아이들, 작은 수상 보트에 과일과 음료수를 가득 실은 여성들, 심지어 매춘을 위해 밤거리에 늘어서 있는 여성들조차 구경 거리가 된다. 내가 그 시선을 일면 자연스럽긴 해도 한편으로 차별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이면에 나만큼은 저들보다 훨씬 안락한 삶을 살고 있다는 안도가 도사린 것 같기 때문이다.

부자는 전생이 착한 사람들이라 부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태국 사회에서 극심한 빈부 격차가 해소될 여지는 크지 않고, 최하층의 젊은 여성들은 거대한 향락 산업의 하수구로 내몰리는 냉엄한 현실을, 지인의 사진 안에 찍힌 해맑은 표정의 사람들에게서 읽을 도리는 없다. 

나 역시 방콕에 갔을 때 수상 보트 위의 여성이 그 누런 강물 위에서 평생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헤아리는 것보다 그의 장사하는 방식 자체가 신기하고 이채롭게 보였을 뿐이다. 여행자의 시선은 곧잘 그렇게 방임적이거나 낭만적인 수준에 머물기 일쑤다. 그러므로 낯선 곳에 갔을 때, 그 환경에서 삶을 일구는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최대한 겸손해야 한다고, 쉽게 그들을 구경거리로 타자화하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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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겸손한 시선이라는 측면에서, 남미 감독 월터 살리스가  연출한 걸작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2004)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받은 <중앙역>(1998)으로 이미 로드 무비의 진수를 선보인 바 있는 그는, 젊은 시절의 체 게바라와 그의 절친한 친구를 주인공으로 앞세운 이 영화를 통해 여행에서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통찰적 질문을 던진다.

두 젊은이들은 끓어 오르는 에너지와 열정 하나에 의지한 채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남아메리카 대륙 횡단 여행에 나선다. 역시 리비도 과잉의 젊은이들답게 여행지에서의 설렌 로맨스를 시도하기는 하지만, 이들이 결국 목도하게 되는 것은 신음하는 민초들의 처절한 삶이다. 그것이 나중의 전설적 혁명가 체 게바라를 형성한 아주 중요한 모티브가 됐다는 사실은 이 영화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여행자로서의 방임적 시선 혹은 권력적 태도가 아니라 그들이 바라보는 대상과 눈과 몸의 높이를 맞추려는 겸손한 노력이다. 감독은 요즘 젊은이들의 티셔츠를 장식한 그림처럼 체 게바라를 박제화하거나 영웅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여정을 무심한 듯 따라가며 그의 시야에 들어온 세상과 그의 의식이 어떤 상호 작용을 일으키는지를 가늠하려는, 또 다른 겸손한 시선을 얹는다.

이런 여행자라면 사진에 찍힌 내 모습 뒤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무엇을 찍어 왔느냐, 일 것이다.


*여행주간지 '트래비'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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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겨레 신문을 보다가 인상적인 칼럼을 읽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77253.html

요컨대, 욕망은 채우면 채울수록 커져가는 녀석이라 잘 조절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좋은 말씀입니다. 헌데...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칼럼 중에 소개된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론'에 수긍이 갑니다. 사실, 각종 CF나 온갖 영상 매체들, 과시적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는 늘 새로운 욕망을 창출해 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자연스러운 사회에서 이윤 동기를 만족시키기 위해 욕망의 확대 재생산을 자극하는 중개자는 더욱 창궐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카드 대란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테고,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 가랭이 찢어지고 마는 사교육의 범람 현상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물질주의적 집단 욕망에 편승한 2MB가 정권을 잡지도 못했겠죠.

더 큰 문제는 이 욕망의 시스템 안에서 나만 지혜롭게 욕망을 다스린다 할지라도, 채우지 못한 욕망에 치떠는 누군가가 휘두른 칼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숭례문 화재사건, 일가족 살인 사건, 안양 초등생 살인 사건 등 올해 들어서만 그런 끔찍한 상황을 여러 차례 목격했습니다.

욕망이란, 그렇게 다분히 사회적인 것이며, 따라서 나뿐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포함한 욕망의 사회적 분배 상황을 주의 깊게 가늠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즉, 저는 욕망이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만 즉각 환원될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게다가 욕망이 아닌 욕구 충족만으로 인간이 자족할 수 있다면, 예술의 진화 발전도 요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봅니다. 예술이란 필연적으로 욕망의 불균형적 상태에 대한 고뇌의 산물이자 더 아름다운 것을 찾고자 하는 과잉 욕망의 결과물이기 때문이죠.

욕망이란, 정말이지 징글맞은 원죄이자 때로는 행동의 에너지원을 제공하는 축복이니 이런 걸 두고 아이러니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저 역시, 오늘은 채우지 못한 욕망 때문에 이를 앙다물다가 내일은 어떤 욕망에 이끌려 집 문을 나서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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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출연 섭외 전화가 걸려 온다.
"한국영화 산업의 문제점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시죠."
나는 묻는다.
"방송이 언제죠?"
"내일 아침 7시입니다."
앗! 그 시각엔 꿈나라를 탐험할 시간이다. 꿀같은 잠을 포기하면서까지 저널리스트로서의 책무를 다할 것인가. 아니면 게으름뱅이로서의 삶의 철학을 지킬 것인가. 찰나의 고민 끝에 어렵게 입을 뗀다.
"저 죄송하지만, 그 시각에 제가....다른 방송 일정이 있습니다."
거짓말이다. 나는 잠에서 깨고 싶지 않을 뿐이다. 자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말할 경우 저쪽에서 돌아올 콧방귀 또는 어이 상실의 반응이 두려운 나는, 그렇게 둘러댄다.

얼마전엔 내 팔자와 전혀 상관 없을 것 같은 '공직'을 제안받은 적이 있다. 제안한 이는 말했다. "공직에 나간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라고. 그러나 나는 명예보다 '마음 편함'을 선호하는 편이고, 게다가 그 자리가 얼마나 골치 아픈 일에 휩싸여 있어야 하는 곳인지를 모르지 않으므로, 결국 거절했다. 그러나 그 거절의 뜻을 밝히는데 꽤나 애를 먹어야 했다. 우선 명예라는 보편적 욕망을 원하지 않는 이유를 개발해야 했고, 제안한 이의 선의에 찬물을 뿌리지 않는 거절의 수사를 찾아야 했다.

나이 먹어가면서 이런저런 제안을 받을 때가 있지만, 대개 내가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일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싫다'고 솔직하게 거절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관계 지향적인 한국사회의 네트워킹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거니와, 제안한 이가 거절을 당할 때 얼마나 민망해 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렇게 거절하는 게 어려운 문화에 대해 박노자는 최근 낸 책 '만감일기'에서 이렇게 진단한다. "6.25 이후 '가족끼리 단단히 뭉쳐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생존도모'의 가족주의가 공고화되면서 '거절'이나 '거부'를 좀 이상하게 보는 분위기가 조성된 게 아닌가 싶다." 요컨대 둥글둥글하게 사는 게 미덕인 사회에서 거절을 한다는 것은 모난 돌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는 거다. 거절을 할 경우 돌아올 부작용이나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이 거절 자체를 어렵게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 일에 대해 과감하게 거절을 못하면 결국 메이게 된다. 할 수 없이 질질 끌려 다니게 되고, 그런 일이 되풀이되거나 장기화되면 짜증이 나고 결국 '이게 뭔가'하는 회의감이 몰려오기 일쑤다. 그러므로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거절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삶의 중요한 미덕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노자는 거절의 미학이 중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은 반문으로 역설한다. "모나지 않게 둥글게 사이 좋게 원만하게만 살아야 한다니,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아야 하는 걸까?"

앞서 말한 사례에 언급된 라디오 프로그램의 섭외 담당자는 다음날 다시 전화를 걸어 이렇게 물었다. "내일 아침 7시에도 다른 방송이 있으세요?" 달리 할말이 없었던 나는 할 수 없이 그의 섭외를 수락함으로써, 거짓말로 둘러댔던 대가를 끝내 치르고 말았다. "그 시각에 전 자야 하고, 잠을 자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저한테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그러니 죄송하지만 섭외에 응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솔직하게 거절하지 못한 죄였다.

박노자의 만감일기 상세보기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펴냄
인간 박노자의 사적이면서도 사회적인 통찰의 기록 <박노자의 만감일기>는 '인간' 박노자의 사적이고 사회적인 고백을 전해주는 책이다. 개인과 가정, 역사와 사회에 대한 사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궁금증과 생각을 풀어낸 인터넷 블로그 일기들을 모아 엮었다. 너무 민감하거나 너무 개인적이라서 그동안 신문, 학술지 등지에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박노자의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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