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08/01/30 나는 좌파 맹동주의자다 (10)
  2. 2008/01/25 바닥이 드러나기 전에 채우기 (2)
  3. 2008/01/21 나의 지겨웠던 베니스 여행 (2)
  4. 2008/01/19 서재 산책 (8)
  5. 2008/01/12 호르몬의 감수성 (8)
  6. 2008/01/11 무기력증에 대하여 (11)
  7. 2008/01/05 블로거, 정킷 가다 (8)
  8. 2008/01/03 각성제가 필요한 한국영화 (4)
3M흥업을 같이 하고 있는 김경찬 피디의 블로그에 들어가 봤더니, 커밍아웃을 하셨더군요. 제목도 참 직설적이기도 하지. "나는 좌파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이니 자칭타칭 좌파들은 깨갱하는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좌파적 정체성을 밝히는 심정이, 전 살짝 이해가 갑니다. 그간 좌파도 아닌 사이비 진보들이 좌파 취급 당하면서 싸잡아 '무능'이라는 수사에 갇혀 버린 데 대한 반발심이겠지요.

예전에 제가 쓴, 지금은 기억도 별로 안나는 칼럼을 두고, 한 386 선배는 저한테 '좌파 맹동주의자'라고 하더군요. 그 선배도 진보주의자인양 행세하고는 있지만, 자신의 실리와 이해가 걸렸을 땐 슬쩍 실용주의자를 자처하니 제 눈엔 회색분자로밖에 보이진 않는데, 그로부터 좌파 맹동주의자라는 소리를 들으니 부아가 치밀기도 했습니다.

가끔 '좌파적'이라는 게 뭘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제 스스로를 어떤 사상적 카테고리로 묶는다는 게 거부감이 들기도 해, 누군가 나를 좌파로 부르는 것을 떠나 스스로도 좌파라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간 제가 써왔던 글들을 찬찬히 곱씹어 보면, 제가 어떤 좌파적 자장권 안에서 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이를테면, 전 '인간의 본원적 욕망'이라는 단어보다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짓눌린 인간'이라는 표현을 더 즐겨 쓰는 편입니다. 이것은 영화 보기의 방법론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일쑤인지라, 지배 계급의 부도덕성을 통렬히 고발하는 영화를 보면, 전 그냥 오금이 저릴 정도로 감격의 쓰나미에 휩쓸립니다.

주어진 절체 절명의 기로에서 어떤 길을 택할 것이냐는 모든 인간에게 드리운 딜레마입니다. 말하자면, 보편성입니다. 모든 종류의 이야기 미학은 이 보편성을 토대로 만들어지죠. 그러나 전 이러한 보편성 안의 특수성, 즉 그 선택을 강요하는 시대와 정치적 환경, 어떤 사회 구조와 그 구조위에 서 있는 권력의 타당성에 의문을 표시하는 게 이 시대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제 일의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어나 살다 죽는 것 자체에 허망함을 표시하는 건 선대 예술가들이 이미 다 한 짓이기에, 무엇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인가에 의문을 표시하는 게 그나마 진화한 예술가의 책무라는 믿음 때문이죠.

그래서 제 어쭙잖은 영화평도 곧잘 그 방법론에 의지합니다. 다만, 저는 이런 방법론이 낡아도 한창 낡았으며 그래서 지나치게 나이브한데다 보는 이에 따라선 수준 미달의 글쓰기로 읽힐 것이라는 점을 은근히 걱정하는 비겁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 거대담론의 유효성을 물고 늘어지는 건, 아마도 거대 담론을 촌스러운 것으로 취급하게 된 과정이 더욱 비겁한 성급함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제 성장 환경이 그랬으며, 제 계급적 기반이 그러하였습니다.

대중에게 말걸기를 업으로 삼은 지금도, 여전히 갈피를 잡기 힘듭니다. 다만, 이 매체 환경이 다행히 하나의 관점을 절대화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냥 나이브하게 밀어 붙여 보는 것입니다. 적절한 지점에서 균형과 중용의 미덕을 발휘한다는 것이 위선적인데다 기만적이란 생각이 들기에 내 본능이 시키는대로 따라가 볼 뿐입니다. 촌스럽다, 맹동주의다, 욕을 얻어 먹을지언정. 헌데 그러다 보니 가끔 동지가 그립습니다. "죽는 날까지 너를 사랑한다"고 자기 피를 꺼내 말해주던 그 옛날의 친구가.
Posted by cinemAgora
이번 한 주는 그야말로 눈 코 뜰새 없이 바빴습니다. 일이 덤벼들라치면 가끔 이렇게 한꺼번에 덤벼 듭니다. 대만 정킷 취재 다녀온 기사를 FILM2.0과 3M흥업에 각각 다른 버전으로 송고하고, <더 게임>의 이혜영 씨 인터뷰 기사도 FILM2.0 설합본호 마감에 맞춰 송고하느라 뒷목이 뻐근해져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있을 <씨네 파파라치> 2주분 녹화 원고 준비까지. 아침 저녁으로 쉴 틈이 없는데, 다행히 오늘 아침에 제 블로그에 글을 쓸 약간의 짬이 났네요.

돈 버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 보니 영화 볼 시간, 차분히 앉아서 책 읽을 시간도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모순인 듯 해서 지난주부로 일단 라디오 프로그램 2개의 출연을 중단했습니다. 명색이 영화 기자가 영화를 봐야 어디가서 '썰'을 풀게 아니겠습니까. 두 개 다 목요일에 잡혀 있던 스케쥴인데, 수요일 부산 다녀오면 하루라도 좀 여유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미처 못 본 영화도 챙겨 보고 책도 도 좀 읽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정을 뺐더니 금세 저 일정이 치고 들어왔습니다. 게다가 설 연휴 끝나면 김태훈씨와 인터넷 방송 하나를 더 하게 될 것 같고, FILM2.0 토크2.1에도 참여하기로 해 놓은 상태이니, 지금으로선 이걸 다 소화해 낼 수 있을지 대략난감입니다.

새해 다이어리 1월 달력 위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바닥이 드러나기 전에 채워라!" 언제나 생활의 원칙을 써 놓으면 그 반대의 현상이 벌어지는 게 제 징크스입니다. 이를테면 담배를 끊자, 써놓으면 흡연량이 늘어납니다. "건강을 위해 금주"라고 써 놓고 연일 술입니다. 채워라, 해 놓고는 바닥의 살짝 남은 물까지 박박 긁어 퍼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이어리에 써 놓는 생활의 원칙을 바꿔 볼까 합니다. 쉬지 말고 열심히 일하자! 이렇게 말이죠. 제 욕심을 시샘해 항상 반대의 결과로 이끄는 생활의 신을 살짝 속여 먹는 것이죠. 그러면 좀 놀게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듭니다.^^
Posted by cinemAgora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베니스에 가 본 것은 두 차례다. 한 번은 관광을 위해서였고, 또 한 번은 영화제 취재를 위해서였다. 처음 베니스에 갔을 때, 다른 관광객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감탄을 연발했다. 산마르코 광장의 수 많은 비둘기 떼, 도시를 촘촘히 엮어 놓은 크고 작은 운하와 곤돌라,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어려울 정도의 미로와 같은 작은 골목 등 그곳은
이국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신기한 볼거리의 집합지였다. 도시 전체가 바닷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한 베니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의 바다 버전쯤 돼 보였다. 도대체 이 짠 바닷물 위에 이 견고한 벽돌 도시를 짓게 한 역사적 원동력이 무엇일까, 잔뜩 지적 호기심을 지닌 채, 나는 이 골목 저 골목 이 운하 저 운하를 킁킁거리며 신나게 쏘다녔다.


2
년 뒤 다시 베니스를 찾게 된 것은 베니스국제영화제 때문이었다. 첫 번째 방문이 1 2일의 짧은 기간이었다는 게 못내 아쉬웠던 나는, 보름 가까운 영화제 기간 동안 이 신기한 도시를 실컷 볼 수 있게 됐다는 데 마냥 흥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흥분은 채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 베니스국제영화제는 베니스에서 수상 버스로 약 40분 정도 가야 하는 리도 섬에서 열린다. 경비 문제 때문에 베니스 섬이 아닌 육지 쪽에 숙소를 마련해야 했던 나는, 숙소에서 베니스까지 버스로 30, 베니스에서 리도까지 배로 40, 다시 리도 선착장에서 행사장까지 버스로 10분을 이동해야 했다. 걷는 시간까지 합치면 숙소에서 행사장까지 왕복으로 거의 세 시간. 그걸 매일 되풀이한다면, 그것도 매일 아침 6에 출발해 밤 11시쯤 돌아오는 일정이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지 상상이 되시려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닷새쯤 그렇게 살다 보니 수상 버스라면 이가 갈릴 지경이 됐다. 배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마르코의 풍광은 더 이상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 채 멀리 서 있는 희뿌연 박제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관광객들이 풍기는 역겨운 땀냄새와 뒤섞여 절로 얼굴이 찌푸려진다. 배에만 올라타면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던 사진 기자는,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앉을 자리를 찾기 위해 혈안이고, 운 좋게 자리가 나면 앉자마자 필사적으로 부족한 잠을 청한다. 매일 새롭게 밀려오는 관광객들은 똑 같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똑 같은 피사체를 향해 사진 찍기에 바쁘고, 어느새 베니스가 일터가 돼 버린 우리에겐 그들의 감탄사가 그저 소음, 벌들이 윙윙 대는 소음으로 들릴 뿐이었다.


영화제 취재 도중, 베니스에 거주하는 이탈리아 여학생 두 명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동경해 마지 않는 이 멋진 도시에 사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기대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젊은이들은 기회만 되면 베니스를 떠나려고 하죠. 이곳은 너무 심심하고, 왠지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열흘 남짓 산 내가 그런데,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동행한 후배 기자 역시, 이국적 풍광에서의 쳇바퀴 일상을 소화하며 너무 열심히 영화를 보러 다닌 탓에 나중에는 얼굴색이 간암 말기 환자처럼 변해 버렸다.
베니스 왔는데 관광도 좀 하고 그래라. 내 심드렁한 참견에 그도 심드렁하게 답했다. 영화 볼 시간도 부족해요, 선배. 영화제 폐막을 이틀 앞두고, 나는 후배에게 모든 일정을 중단하고 베니스 하루 관광을 명했다. 약속 장소인 리알토 다리에서 두 시간을 서성거렸지만, 심드렁한 후배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나와 사진 기자는 꽤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에 무작정 들어가서 남은 출장비를 탈탈 털어 가장 비싼 메뉴를 시켜 배불리 먹고, 지친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여행 주간지 '트래비' 최근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Posted by cinemAgora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는 산책을 즐기는 편입니다. 집 주변에 몇 개의 산책 코스를 마련해 두고, 상황에 따라 다른 산책길에 나섭니다. 운동이 필요하다 싶거나 날씨가 우라지게 좋은 날은 호수공원에 갑니다. 가는 데까지 1킬로미터, 호수공원 한바퀴 도는 데 약 4킬로미터, 그리고 집까지 다시 1킬로미터니까 걷기 운동 코스로는 제격입니다. 공원에 가기 어려운 한밤중이거나 그냥 신선한 공기가 필요할 경우, 집 주변 네 다섯 블록을 한바퀴 돕니다. 술이 살짝 고픈 밤이면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난 산책길을 따라 전철역까지 걸어갑니다. 거기 제겐 참새 방앗간과도 같은 포장마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주 한잔 걸치고 살짝 오른 취기를 안고 집까지 걸어오는 길은 마냥 행복합니다.

오늘 같이 추운 날은, 서재방을 산책합니다. 3~4평 남짓한 서재방은 문에서 창까지 채 다섯 걸음도 안되는 좁은 공간입니다만, 이곳은 제 마음이 산책하는 곳입니다. 책상을 가운데 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책장 속에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한 채 어깨동무하고 서 있는 책들을 바라 보는 것이죠. 전혀 관련이 없는 책들이 이웃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제 자리를 찾지 못해 전철 짐칸에 누운 노숙자 마냥 틈새를 비집고 벌러덩 누워 있는 책들도 있습니다. 읽은 책보다 읽을 책이 더 많고, 제 책보다 아내의 책이 훨씬 더 많지만 제게 서재는 우주의 띠끌과도 같은 영역을 한줌 떼어다 갖다 놓은 듯한 공간처럼 신비롭습니다. 저기 세상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인간들의 숭고한 욕망이 서려 있는 책들은 그 자체로 장엄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재는 또한 제 초라한 지적 탐험의 지도이자 발자취이기도 합니다. 학창 시절에 읽은 책부터 지금까지 읽은 얼마 안되는 분량의 책들이 이사 다니면서 분실된 것 빼고는 거의 다 꽂혀 있습니다. 이를테면 위의 사진은 제가 대학교 때 읽었던 책들만 따로 모아 놓은 블록입니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 때는 세상 돌아가는 구조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듯 합니다. 전공이 역사인데, 역사 관련 서적 보다는 사회과학 책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죠.  거기에 비하면 최근 읽은 책들은 오히려 질정이 없습니다. 소설과 에세이가 가장 많고 간혹 미술사와 인문학 책이 뒤섞여 있습니다. 영화 글쓰기로 먹고 살면서 정작 영화와 관련한 책은 몇 권 안됩니다.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전 이상하게도 영화는 읽는 것이 아닌 보는 것이라는 자기 변명적 강박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유명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줄줄 꿰는 일에는 어지간히 취미가 안붙습니다. 네, 그야말로 '후루꾸' 영화기자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작은 우주를 유영하다 지치면 서재 구석에 놓인 작은 가죽 소파에 몸을 깊이 담근 채 상념에 빠집니다. 이미 과밀 증상에 시달리는 책장과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바닥 위의 책들을 번갈아 보면서, 저걸 어떻게 정리할까, 책장을 하나 더 살까 생각도 하고, 사 놓고 미처 읽지 않은 책들의 목록을 만들어보기도 합니다. 대부분은 그냥 목록 만들기에 그치고 말거나, 또 읽지도 못할 책을 지적 허영심에 들떠 대뜸 사버리기 일쑤이지만 말이죠.

어쨌든 책은 지인이나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 보다는 왠만하면 사서 읽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소장은, 그 자체로 자신의 지적 여정을 증거하는 개인사 박물관과도 같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내가 무엇을 얻었고, 또는 무엇을 놓치고 살고 있는지 찬찬히 곱씹을 수 있습니다. 서재 산책은, 그래서 언제나 차분한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여전히 추위가 물러날 기미가 없는 오늘 아침에도, 나는 커피를 홀짝 거리며 저 익숙한 작은 우주를 이방인의 시선으로 기웃대고 있습니다.
   
Posted by cinemAgora
TAG 산책, 서재

EBS '세계의 명화' 소개해주시던 이용관 교수는 말끝마다 '걸~짝입니다' 했다. 안 본 지 꽤 돼 지금도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때마다 나는 '저 양반은 모든 영화가 걸작이네' 하던 기억이 난다. 냉소와 거리 두기가 내 직업의 근간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살던 나로선 왠만한 영화를 봐도 시들하던 때였으니, 이용관 교수의 걸작 타령이 영 미덥지 않게 느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이가 시나브로 먹어가니 이 교수가 왜 소개하는 영화들마다 '걸~짝입니다' 힘주어 강조했는지 대충이나마 짐작이 간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감수성이 무뎌지는 게 아니라 더 발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요즘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민한 감수성의 촉수엔, 단 한장면이라도 인상적이거나 심금을 울린다면, 작품의 미덕이 훨씬 도드라져 보이기 마련일 터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직 안봤다면 꼭 보시라!

요즘 나에게도 걸작이 많아졌다. 며칠전에도 DVD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고 난 뒤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 같은 마음을 애써 추스리며 "걸작이야, 걸작!" 하루 종일 감탄을 연발했다. 그러고도 흥분이 채 가라앉질 않아 술 한잔을 한 뒤에야 잠이 들 정도였다. 요즘 읽고 있는 김애란의 소설 <침이 고인다>도 내겐 무릎을 치게 만드는 걸작이고, 케이블에서 해주는 니노미야 카즈나리 주연의 <타로 이야기>도 걸작 드라마다. 하물며 지난 주 출연한 ETN 프로그램 'EnU'의 배혜진 작가가 써준, '영화속 팜므 파탈'
사용자 삽입 이미지

88만원 세대의 고뇌

을 다룬 방송 원고도 내겐 걸작이었다.

오늘도 처조카의 결혼식장에 갔다가 눈물이 핑돌아 혼났다. 천편일률적인 예식은 언제나 지루하기 짝이 없지만, 단 한순만큼 나는 숙연해진다. 신랑 신부가 양가 부모들을 향해 인사할 때다. 그 순간의 신랑 신부가 어떤 감정일까, 하는 것 보다 품 안의 자식이 더 이상 품안의 자식이 아니라는 걸 공식 확인하는 그 순간, 만감이 교차할 부모의 심정이 되곤 한다. 무자식 상팔자주의자인 내가 그러니, 참 이상한 노릇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타로 이야기, 잼있다!

가끔 TV 드라마나 휴먼 다큐멘터리를 볼때도, 하물며 앙상한 겨울 나무를 바라볼 때조차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 때가 있다. 누군가는 그게 나이가 듦에 따라 체내에 남성 호르몬이 약화되고 여성 호르몬이 증가해서 그렇다는데 제법 그럴듯한 분석이다. 특히 스트레성 탈모를 예방하기 위해 남성 호르몬 억제제를 장기 복용해온 나로선 더더욱 신빙성 있게 들리기도 한다.

여하튼 껄껄 호탕하게 웃는 시간이 줄어드는 대신 가슴 한켠이 먹먹해지는 듯한, 뭔가 처연한 느낌을 받을 때가 더 많아지는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뭐 굳이 거창하게 표현하면 '삶의 부조리함에 대한 실존적 고독'쯤 되는 그런 감정일 게다. 카뮈가 '세상의 정다운 무관심'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 고립감. 남들은 사춘기 때 다 졸업했을, 그 관념적이고 사치스러운 감정이 시도 때도 없이 불쑥 고개를 들 때면 스스로도 가끔 당황스럽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종교처럼 신봉하고 있는 내가 왜 이럴까. 그래, 호르몬의 작용이다!  빌어먹을 호르몬이 나를 이렇게 과잉 센티멘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애써 방어적 자기 분석을 해보지만, 솔직히 그 감수성이 싫지만은 않다. 사물이 보여지는 대로 무미건조하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 가슴에 어떤 새로운 상(像)을 만들어 내며 슬픔과 연민의 느낌을 잉태하는 과정은, 감정 이전에 이성을, 영혼 이전에 물질을, 상부구조 이전에 시스템과 토대를 중요시하며 살아 왔던 나로서도 새로운 삶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다. 슬픔이 기쁨이라니. 그렇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슬픔을 잊은 채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러니 내 몸안에서 쑥쑥 자라고 있는 여성 호르몬에게 감사할 일이다.

Posted by cinemAgora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집 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 풍경입니다.

모처럼 눈 다운 눈이 내렸네요. 창밖 거리가 온통 하얗게 변했습니다. 대만 출장길에 얻어온 녹차 한잔을 끓여 놓고 한 없이 가라 앉기만 했던 몸과 마음을 재부팅해 봅니다.

출장길에서 돌아온 게 지난 월요일, 공항에 내리니 사방이 온통 짙은 안개로 가득했습니다. 차를 몰아 시내로 들어오면서 이 안개가 시내를 가득 덮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문득 이상한 공포감이 엄습했습니다. 한 치 앞을 구분하기가 힘들 정도의 짙은 겨울 안개, 2008년의 시작과 함께 찾아온 이 괴기스러운 안개가, 마치 지금의 나와, 내가 서 있는 이 땅의 상황을 은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날 밤 마흔 목숨이, 내 목숨의 사십 배가, 어느 악마같은 자본가의 탐욕에 의해 불에 타 버렸습니다.

그 뒤로 무기력증이 찾아왔습니다. 이상하게도 블로깅을 한다는 게 부담스러워졌습니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갈피를 잡기도 힘들 뿐더러, 지금 영화와 세상에 대해 한마디를 더 보태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회의감이 몰려 들었습니다. 쥐뿔도 모르고 혹세무민하고 있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누군가 이런 제 '깜냥'을 눈치챌 것만 같은 불안감. 한편으로는 저 짙은 안개에 뒤덮인 세상에 단말마와도 같은 발언들을 내뱉어 봤자 악마처럼 낮게 웅크려 꿈틀대고 있는 안개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삼켜 버리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게죠.

다행히 지난 한 주 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난 게 무기력증 탈피에 꽤 도움이 됐습니다. 1년 동안의 미국 연수에서 돌아온 전 직장 동료가 뉴욕의 한 공원에서 갑작스러운 협심증으로 죽을 뻔한 경험을 들려주면서 그러더군요. "그 때 두가지 생각이 들었어. 내일 내 숨이 끊어질 수 있겠구나, 그렇다면 오늘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 또 하나는 어차피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뭐하러 애면달면하고 사나, 그냥 여유만만하게 즐기는 게 좋은거지. 어떤 삶을 선택할지는 결국 자신에게 달린 것 같아."  제가 보기에 그 친구는 전자와 후자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적절하게 균형점을 찾은 듯 했습니다. 사실 그게 가장 현명한 것이겠죠.

맹렬하게 살아 움직여야 하는 이유를 끊임 없이 탐색할 수밖에 없는 건, 우리에게 지워진 운명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때론 그것 자체에 지치고 괴롭지만 그래도 탐색하지 않는다면 살아가야할 이유를 상실하는 더 큰 공포에 직면하게 될테니까요. 아마도 지난 며칠간 제 존재 이유를 탐색하는 게 슬쩍 지겨워 졌나 봅니다. 아니면 주말 출장 때문에 늘 자극이 돼 주고 계신 병상의 어머니를 뵙지 못한 부채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죠. 오랜 알츠하이머로 의사 표현은 못하시지만 어머니는 늘 이렇게 얘기하시는 듯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 봅니다. '이유를 알아서 사니? 사는 것 자체가 이유지. 삶의 과정이 삶의 이유를 만들어내는거란다.' 주말을 틈타 어머니를 뵙고 툭툭 털고 일어나야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가 늘 블로깅을 하는 책상이죠.

Posted by cinemAgora
인천공항입니다. 주말을 틈타 2박 3일간의 대만 정킷 취재 여행을 갑니다. 팀블로그 3M흥업이 2월 개봉 예정인 주걸륜 주연의 중국 무협 액션 영화 <쿵푸 덩크>의 타이페이 쇼케이스 행사에 초청받았기 때문입니다. 주성치의 <소림 축구>처럼 농구에 쿵푸를 접목시킨 코믹 액션 영화입니다. 제작자와 감독, 그리고 주연배우 인터뷰가 예정돼 있습니다.

FILM2.0에 있을 때 몇 번의 해외 정킷 취재를 간 적이 있었는데, 소속 매체를 박차고 나온 프리랜스에게도 이런 기회는 오는군요. 이게 다 요즘 한창 주가 상승중인 블로그가 서서히 기존 매체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갖게 되면서 생긴 수혜입니다. 거기에 숟가락 하나 더 얹은 '3M흥업'이 적지 않은 분들의 사랑과 질타(혹은 질투?)를 동시에 받게 되니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됐습니다. 이번 정킷 취재는 3M흥업의 열혈 독자를 자임하는 한 분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너무 짧은 시간에 후닥닥 결정된 정킷 여행이라 여러모로 준비가 많이 부족합니다. 인터뷰 내용도 정리가 안돼 있고, 제 경험상 이럴 때는 그냥 취재 대상에 대한 열렬한 호기심과 직관에 의존한 채 한국인의 미덕, '맨땅에 헤딩 정신'을 발휘해 보는 수밖에 없죠. 아마도 낮엔 맨땅에 헤딩하고 밤엔 술통에 헤딩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이틀에 걸친 디너를 준비해 놓고 계신 그쪽 영화 제작자께서 굉장한 주당이라는 첩보를 입수해 놓은 상태라 벌써부터 위장 한켠이 아득해 집니다.(술 끊을 결심을 하신 jacosmile님께는 미안한 마음이 앞섭니다. 그려^^)

무엇보다 이 엄동설한에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게 돼 푸근한 마음입니다. 냉온탕 하듯, 잠시 사우나에 들어갔다 오는 기분으로 잘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와서 풍성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을 수 있도록 본연의 임무(?)에도 물론 가급적 충실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십시오.



   
Posted by cinemAgora
폭력과 자체 모순으로 뒤엉킨 미국의 현실을 읽어내는 <아메리칸 갱스터>
▲ 폭력과 자체 모순으로 뒤엉킨 미국의 현실을 읽어내는 <아메리칸 갱스터>

연말에 눈에 번쩍 뜨일 영화 한 편을 봤다. 리들리 스콧의 <아메리칸 갱스터>다. 적지 않은 평론가들이 냉소했던 그의 전작 <킹덤 오브 헤븐>조차도 십자군을 불러내 기독교 근본주의의 팽창주의 속성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담아낸 걸작이라며 감읍하며 봤던 나로선 이번 영화를 목이 빠져라 기다린 것도 당연했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1960~1970년대 미국 사회를 대조적으로 상징하는 두 명의 실존 인물, 마약으로 할렘을 지배한 갱스터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와 그의 뒤를 쫓는 청렴한 마약 수사관 리치 로버츠(러셀 크로)를 주인공으로 앞세운 영화다. 갱스터 누아르 장르의 전형성을 따르는 듯 비켜가며 새로운 전형을 창조해낸 연출 내공은 둘째로 치고, 내가 이 영화를 보며 무릎을 칠 수밖에 없게 된 지점은 사실 따로 있었다. 세상에 대응하는 두 인물의 행동과 선택을 텍스트 삼아 미국 사회에 내재한 폭력성과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의 근원적 모순을 한꺼번에 꿰뚫어 보는 리들리 스콧의 용감무쌍한 통찰력이었다.

과연 노장의 솜씨는 녹슬지 않았다. 아니 나이가 들수록 파릇해지는 듯, 그는 영화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발언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장르에 통달한 장인의 실력으로 관객의 폐부에 아로새긴다. 1970년대 <대부>와 <지옥의 묵시록>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이른바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정점에 서 있었다면, 포스트 9.11 시대의 할리우드에는 리들리 스콧이라는 거장이 우뚝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대의 관객과 창작자가 함께 발 딛고 서 있는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 영화가 설득력 있게 의문을 표시하는 풍경은 언제나 눈부시다. 내가 보기엔 요즘 나오는 일련의 할리우드 영화들이 그렇다. <아메리칸 갱스터>와 더불어 올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영화상을 다투게 될 또 다른 걸작 <마이클 클레이튼>이나 뮤지컬이라는 형식을 통해 차별의 정치학을 통찰하는 유쾌한 영화 <헤어스프레이>같은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들은 확실히 노는 물이 다르군’ 하는 질투심과 감탄이 뒤섞인다. 지난해 내가 본 최고의 걸작 <시리아나>는 물론이고, 서구인의 럭셔리한 욕망이 어떻게 아프리카를 추잡하게 착취하고 있는지를 묘파한 <블러드 다이아몬드>, 세계화를 명분으로 내세운 초강대국의 가공할 네트워크가 개인을 무력화하는 풍경을 액션 스릴러의 틀 안에 버무린 <본 얼티메이텀>도 그런 감상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영화들이었다.

내부고발에 관해 고찰 <마이클 클레이튼>(좌), 인종과 외모에 대한 유쾌한 승리 <헤어스프레이>(우)
내가 '노는 물이 다르다'며 사뭇 문화 사대주의적 관점을 들이대는 이유는, 이들 영화들이 신자유주의의 관점에서는 진부한데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것처럼 들릴만한 질문들을 바로 그 신자유주의의 근원지라 할 수 있는 미국 사회의 내부로부터 다시 끄집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지금,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 영화를 흔쾌히 ‘올바름의 영화’로 묶기를 좋아한다.

제국주의니, 쇼비니즘이니 하는 비판 틀이 진부함과 동의어가 되다시피 한 작금의 비평 환경을 상기한다면, 이들 영화를 올바름의 영화라는 범주로 묶는 이런 시도조차 촌스럽게 들릴 것 같다는 걱정을 아예 접어둘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이들 영화들이 이 시대의 많은 관객들을 솔깃하게 만드는 데는 나름의 배경이 있을 것이다. 영화가 현실 감각을 상실했을 때 일회용 서비스 상품으로 전락하고 말 듯, 거꾸로 현실을 정치하게 상기시키는 이들 영화들이 영화가 여전히 예술로 대접받는데 필요한 시의적인 방법론을 실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요즘 이렇게 할리우드에서 부쩍 ‘정신 차린’ 영화들이 잇따르고 있는 것을 두고 많은 평자들이 9.11 테러와 이라크 전의 영향을 꼽고 있다. 처음에는 미국적 가치를 경멸하는 서슬 퍼런 적개심이 실재한다는 것에 놀라 자빠졌던 그들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 삼은 이라크 전이 미국의 패권주의적 침략 전쟁에 다름 아니라는 당혹할만한 상황 인식에 봉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지성과 ‘딴따라’가 공존하는 할리우드는 뉴욕이 정체 모를 세력에게 공격당한다는 설정의 영화를 되풀이해 만들어냄으로써 9.11의 공포감을 재활용하며 미국의 정치 외교적 선택에 대한 불가피성과 정당성을 무의식적으로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한편,‘미국이 왜 이 지경까지 왔나’ 라는, 우리로선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지만, 그들로선 뼛속 깊이 절실한 고민을 진지하게 곱씹는 작품 역시 쏟아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2006년과 2007년에 나온 일련의 영화들을 통해 우리는 그 같은 현상을 하나의 뚜렷한 흐름으로 인식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할리우드의 이런 경향을 바라보며, 세상의 공기가 험악해질수록 창작자들은 잠에서 깨어나기 마련인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베트남 전의 상흔이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부른 것에서도 그 같은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패전의 참담함에 빠져 있던 일본 사회에서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가 꽃 피었던 것 역시 마찬가지다. 비단 영화뿐이랴. 눈부신 러시아의 예술적 유산이 극악무도한 짜르 전제정치의 틈바구니에서 솟아 나왔던 것임을 기억하다시피, 엄혹한 현실의 무게감은 예술가에겐 각성제나 다름 없을 때가 많았다.  

이제 새해를 맞이한 한국사회의 현재로 시선을 돌려보자. 성장과 성공 지상주의가 복지와 분배의 외침을 이겼다. 실적의 논리가 도덕성을 압도했다. 신자유주의의 기치가 하늘 높이 나부끼는 가운데, 승자 독식의 정글에서 낙오된 이들은 점점 삶의 극단으로 내몰리고 있다. 영화계라고 다른가? 다시금 영화는 문화 산업의 선봉으로서의 존재 가치만을 처연하게 확인 받을 뿐 다양성이라는 가치는 영화계의 주류들에게조차 외면 받고 저 멀리 나뒹굴고 있지 않은가.

이런 가운데 영화계는 영화를 만들어도 관객이 안 든다며 울상이다. 영화 투자수익률이 -60%를 넘어섰으니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을 넘어 그야말로 망하기 일보 직전의 분위기다. 오죽하면 영화계 단체들이 욕 들어 먹을 것 뻔히 알면서 ‘영화 관람료를 인상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까지 발표했을까. 지금의 상황을 두고 90년대 말부터 시작된 한국영화의 전성기는 이미 끝났다고 비관적 진단을 내놓는 이들까지 나올 정도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들의 울부짖음이 문화 소비자들에겐 그다지 절실하게 들려오지 않는 것 같다. 적지 않은 관객들이 배부른 소리라고 일축하고 있다. 산업 내부의 불합리한 구조를 방치한 대가로 해일 같은 불황이 닥치자 누굴 향해야 할지도 분간하지 못한 채 타깃 없이 부르대는 절박한 목소리는, 불행히도 울림이 크지 않다. 그동안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떠받쳤던 주 소비자층, 즉 20대가 이른바 '88만 원 세대'의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머리로는 그 심각함을 알겠는데, 마음으로 동조가 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척박한 현실로 내몰릴 때, 한국영화는 그들에게 일회용 위안을 제공하는 대가로 현상적인 전성기를 구가하는 데 만족해 왔기 때문이다. 가장 결정적으로, 현실의 각성제를 자임함으로써 영화가 여전히 예술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데 게을렀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의 영화는 배가 불러 있었다. 안으로 곪고 있었다 할지라도 적어도 관객들을 만나는 많은 영화들이 그래 보였다. 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해 FTA에 반대해 싸웠지만, 정작 한국 사회에 드리운 신자유주의의 그늘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 보인 한국 영화를 만난 기억이 별로 없다. 영화인들이 반 FTA 투쟁을 위해 연대한 농민, 그들의 구체적 삶이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지를 의식적으로 채집해 독창적으로 제시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는 굳이 다큐멘터리와 독립영화로만 다뤄질 수 있는 것인가? 극영화의 장르적 틀 안에서는 도저히 영화적인 소재로 승화될 수는 없었던 것일까? 거기에 대한 현실적 답변은 하나일 것이다. ‘돈’이 안 되는 구태의연한 소재였기 때문이며, ‘올바름’을 논하는 영화는 진부한 접근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래서 90년대 반짝 했던 뉴코리안 시네마의 유산을 폐기처분하고 산업적 팽창기의 착시 현상에 도취됐던 한국영화는, 이제 그 대가로 스스로 장기 침체의 암운 속에 갇혀 버린 신세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시대, 우리의 예술가들은 행복할까, 불행할까. 우리의 영화 문화는 잠에서 깨어날 것인가, 계속 잠들어 있을 것인가, 2008년이 막 시작된 지금, 나는 이것이 궁금하다.

*컬쳐뉴스(www.culturenews.net)에 기고한 글입니다.

Posted by cinemAgo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