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일이다. 동사무소에서 라면을 나눠준다기에 어머니가 나를 보냈다. 우리 집이 생활보호대상 가구였기 때문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참 기분이 언짢았다. 여튼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으니 라면 한 상자가 어디인가, 싶어 갔다가 자존심을 왕창 구기고 말았다. 신수 좋은 분들이 몇 오셔서 어려운 이웃에게 좋은 일 한답시고 사진 찍고 난리였는데, 내가 어려서였는지 꽤 불쌍해 보이는 사진 모델로 안성맞춤이었나 보다. 라면 박스를 받는 시늉을 한 채 사진 몇 장을 찍은 뒤에야 겨우 하나 얻어 들고 왔다.
여하튼 그래서 그 겨울, 하루에 한 끼니 정도는 라면을 끓여 먹었다. 연탄불 위에서 펄펄 끓는 물에 라면을 반으로 툭 쪼개 넣고는 분말 스프를 넣는 게 공식처럼 돼 있었는데, 하도 라면만 먹다 보니 그런 조리법이 왠지 지루해졌다. 해서 어느날 실험 삼아 면을 쪼개지 않은 상태로 넣고 그대로 끓여 봤다. 다 끊인 뒤에도 라면 면발이 넣었던 상태 그대로 남은 것이 신기해도 보이고, 또 그것이 재료의 신선함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 고급 요리의 레시피를 닮은 듯도 해 스스로 뿌듯했다. 더 뿌듯했던 것은 그렇게 끊였더니 라면이 더 맛있다는 발견이었다. 나는 이것을 '원형보존신공'이라고 명명하고 종종 이런 방식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이건 나중에 터득한 것인데, 원형보존신공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계란을 넣는 시점과 방법이다. 라면이 다 익기 약 1분 전에 노른자가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면발 위에 살짝 계란을 얹어 놓는다. 그리곤 거의 반숙의 상태로 라면을 완성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먹을 때 최대한 면발의 원형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 조심 주변부부터 면발을 들어 올린다. 그리곤 훅 한번 입김을 불어 면발의 온도를 낮춘 뒤, 그 면발 그대로 후루룩 한 입에 먹어야 한다. 꼬들꼬들한 면발 위에 물컹한 계란 노른자가 슬쩍 묻어 올라오는 맛이 일품이다. 끝까지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 먹고 나면 왠지 모를 성취감마저 생긴다.
별 이상한데 신경 쓴다 해도 할 수 없다. 당시로선 라면 상자 얻어오면서 다쳤던 자존심을 치유하기 위한 나름의 방식이었는데, 이게 꽤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라면 끓이기에 장인적인 정성을 쏟아 붓는 그 순간만큼은 라면과 내가 마치 혼연일체가 되는 느낌이 들면서 어떤 경지에 오른 듯한 착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물아일체가 아니라 그야말로 면아일체였던 셈이다. 조금 거창하지만, 이 원형보존신공을 통해 나는 어떤 지랄 맞은 상황에도 다치거나 변하지 않는 자신을 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일요일 점심 메뉴가 마땅치 않으면 한번 해드셔 보시라. 원형보존신공 라면!, 생각 보다 삼삼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