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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

 

1. 군중의 심리 구조

 

<군중 심리>의 저자 귀스타브 르 봉은 자기 시대를 ‘현대’라고 명명하고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르 봉이 살았던 시대는 현대라기보다 근대에 가깝다고 봐야겠지만, 어쨌든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시민 혁명의 격동기를 거쳤고, 경제적으로는 산업 혁명 이후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통과하고 있던 그의 시대가 앞선 시대와는 확실히 다른 혁명적 격동기였음은 분명할 것이다. 그 때문에 그가 자신의 시대를 현대라고 명명하는 것은, 전 시대에서는 목격되지 않은 새로운 현상에 일정 정도 압도당했으며, 그 현상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탐문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책의 제목이 명징하게 보여주듯, 그는 새로운 시대의 특징적 현상으로서 ‘군중’에 주목한다. 그리고 자신의 시대를 ‘군중의 시대’라고 명명한다. 그 근거로 그는 다음과 같은 배경 요인을 제시한다. “첫째 요인은 서양 문명의 모든 기본 요소가 뿌리박은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신념들이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이고, 둘째 요인은, 현대의 과학적 발견과 산업적 발견이 완전히 새로운 존재 조건과 사고 조건을 창출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적 진단 속에서 그는 “이제 막 우리가 진입한 시대는 명실상부한 군중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르 봉은 “군중 세력은 먼저 관련 사상들이 널리 유포되어 민중의 정신에 서서히 뿌리를 내린 다음, 그런 사상들의 이론적 개념들을 실현하는 데 몰두하는 개인들이 단계적으로 결합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증대됐다”고 주장한다.

 

군중, 또는 군중 세력에 대한 귀스타브 르 봉의 관점은 한마디로 상당히 비판적이되 어느 정도는 유보적이다. 그는 군중이 가진 위험성을 경고하면서도, 동시에 군중의 잠재력을 평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군중의 속성에 대한 그의 관점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것은 군중의 일반적 특성을 고찰한 제 1장에 잘 드러나 있다.

 

우선 르 봉은 “집단화된 모든 개인의 감정과 생각은 단일하고 동일한 방향으로 집중되어 각자가 지닌 의식의 개성은 소멸하고 만다”는 말로 군중의 특성을 규정한 뒤, “군중은 단일체를 형성하며 ‘군중의 정신을 단일화시키는 법칙’에 종속된다”고 말하고, “일정한 감화력을 지닌 원인들의 영향”을 받을 때 군중 심리적 특성이 드러난다고 덧붙인다.

 

이렇게 군중 심리가 발동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적 특징을 르 봉은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군중을 형성한 개인들이 누구든 그들의 생활 양식, 직업, 성격, 지능이 유사하든 아니든 그에 상관 없이 그들이 군중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이 그들을 하나의 집단 정신에 소속시켜 버린다. 이런 집단 정신은 군중에 포함된 개인들이 고립된 개인들과는 매우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조장한다.”

 

르 봉이 말하는 집단 정신은 군중의 부정적 특성을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즉, “집단 정신에 사로 잡힌 개인들의 지적 재능은 약해지고 그 결과 그들의 개성도 약해진다. 이질성은 동질성에 압도당하고 무의식적 성질들이 우위를 차지한다.” 결론적으로 르 봉은 “군중의 진실은 어리석음이지 축적된 상식이나 타고난 지혜가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군중의 우중(憂衆)적 속성을 경고한다.

 

그렇다면 르 봉은 군중의 이러한 우중적 속성의 근거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을까. 그는 우선 ‘익명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즉 “개인이 군중에 포함되면 단지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들 수가 많다는 생각만으로도 자신이 무소불위의 힘을 지녔다는 감정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군중의 속성을 규정 짓는 또 다른 원인으로 르 봉이 꼽는 것들은 이른바 ‘감염력’과 ‘피암시성’이다. 르 봉의 말을 빌어 종합컨대, “군중은 의식의 개성이 소멸하는 경향, 무의식의 개성이 우위를 점하는 경향, 감정이 생각이 암시에 걸리고 감염됨으로써 동일한 방향으로 집중되는 경향, 암시된 생각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경향”을 지녔다는 것이다. 또한 이같은 군중의 심리적 속성은, 군중에 속한 개인으로 하여금 무의식성, 폭력성, 잔인성을 띄게 만든다는 것이, 르 봉의 진단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라면 군중에 대한 르 봉의 진단은 매우 부정적으로 보이는데, 이런 한편 그는 군중이 지닌 또 다른 잠재력을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르 봉은 “군중이 때로는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음은 의심할 나위없지만 때로는 영웅적인 면모도 보여준다. 하나의 신조나 사상의 승리를 위하여 죽음도 불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고립된 개인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군중”이라는 말로, 그같은 유보적 판단을 드러내고 있다. 군중의 긍정적 속성에 대한 그의 견해는, 군중의 감정과 도적을 논한 2장에서도 반복적으로 강조되는데, “군중은 무의식적 동기의 지배를 너무 강하게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물려받은 오래된 세속적 유습들의 영향력에도 너무 강하게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극도로 보수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한편으로, “군중은 살인과 방화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지만 헌신, 희생, 이타행 같은 아주 고귀한 행위도 할 수 있고 실제로 고립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고귀한 행위를 할 때도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선 장들에서 르 봉이 군중의 행동적, 도덕적 특성을 논했다면, 제 3장에서 르 봉은 군중의 지적 특성을 본격적으로 논한다. 군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상은 ‘감정화된 사상’이라고 말한 르 봉은 “군중의 추론 능력이 지닌 특성은 표면적으로만 서로 유관하게 보이는 상이한 사실들을 연결시키고 특수한 사례들도 즉각 일반화시켜 버린다”고 덧붙인다. 한마디로 군중에게는 이성적인 추론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는 관점이다.

 

이에 따라 군중의 상상력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게 르 봉의 주장이다. “추론 능력을 결여한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군중의 비유적 상상력은 아주 강력하고 대단히 활동적이며 아주 쉽게 감동을 받기도 한다”고 전제한 르봉은 “이미지로써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군중은 오직 이미지에만 감동한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군중의 마음을 완전하고 확실하게 사로 잡으려면 반드시 경악할 이미지를 생산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미지에 휘둘리는 군중의 속성을 간파한 르 봉의 관점은, 미디어를 활용한 이미지 정치가 대세로 굳은 현대 정치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상당히 위력적인 통찰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한 르 봉은 앞서 언급한 군중의 속성이 종교적 외피를 두르고 나타난다면서 그 특징을 편협성과 광신성으로 규정한다. 즉, “우월하게 보이는 자에 대한 숭배, 신뢰하는 인간의 권능에 대한 경외감, 그런 자의 명령에 대한 맹목적 복종, 그런 자가 내세운 교리나 신조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무능력, 그런 교리나 신조를 전파하려는 욕망, 그것들을 수용하지 않는 모든 자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군중이 가진 속성 가운데 주요한 특질로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군중은 당장 자신들을 열광시키는 정치적 신조나 승전한 지도자를 무의식적으로 신비한 권력과 결부시켜 버린다”는 르 봉의 진단은, 이후 파시즘과 나치즘에 이 책이 왜 영향을 미쳤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군중의 여론과 신념

 

<군중심리>의 1부에서 르 봉이 군중의 심리적 특성을 고찰했다면, 2부에서는 군중의 심리가 여론화되는 과정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이같은 접근을 통해 르 봉은 군중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군중을 효과적으로 이끌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제언도 잊지 않고 있다. 우선 르 봉은 군중의 여론과 신념을 결정하는 간접 요인들을 민족, 전통, 시간, 제도, 교육 등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한 뒤, 군중의 정신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더욱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요인들을 나열하고 있다.

 

우선 르 봉은 이미지와 단어, 격언 등이 군중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단어들과 격언들이 군중 앞에서 장엄하게 발설되면, 그 즉시 군중은 하나 같은 표정으로 확연히 드러나도록 그것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면서 그것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르 봉은 군중을 효과적으로 통솔하고자 하는 정치적 지도자들을 위해 더욱 세심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데, “정치적 격변이나 신념의 변화가 발생한 결과 어떤 단어들이 환기하는 이미지들에 대해 군중이 깊은 반감이나 혐오감을 품을 때 진정한 정치가의 최우선 과제는 군중이 물려 받았으면서 차후에 바뀔 수도 있는 정신구조와도 밀접하게 연결된 사건사실들 자체에는 일절 손대지 말고, 그것들을 표현하는 단어들만 바꾸는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 장에서 르 봉은 노골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다. 이를테면 “오늘날 사회주의가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이유도 최근에 태어나 지금도 활발히 작용하는 환상들을 구성한 오류라는 데 있다”고 비판하고, “군중은 결코 진실을 갈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을 시험하지 않을 증거들을 외면하지만, 자신들을 유혹하는 오류들이라면 무조건 존경하고 신성시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덧붙인다. 말하자면, 르 봉은 당대에 위력을 떨치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을 ‘환상과 착각에 의해 만들어진 오류’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사회주의에 비판적이었던 르 봉이 군중을 우중적 속성을 갖는 무리로 규정함과 동시에 지도자들에게 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했다는 것은, 다분히 엘리트 의식에 경도돼 있는 그의 사상적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것은 르 봉이 살았던 시대와 르 봉의 계층적 한계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어쨌든, 르 봉은 군중을 설득하기 위해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까지 세세하게 훈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선 그는, “군중은 자신들을 감화시킬 방법을 아는 강력한 의지력을 지닌 사람의 말은 언제든지 기꺼이 경청한다”고 전제하고, 그 이유를 “군중을 형성한 인간들은 모든 의지력을 상실하고 자신들이 상실한 자질을 보유한 개인에게 본능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지도자들이 이러한 군중의 속성을 알고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활동 수단으로써, 르 봉은 확언과 반복, 감염력을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확언은 지속적으로, 그리고 최대한 동일한 용어로써 반복되지 않으면 실질적인 효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다...확언된 것은 반복됨으로써 끝내 증명된 진실로 인지되어 군중의 정신에 각인될 수 있다.” 르 봉의 이같은 관점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군중을 지배와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려는 불순한 세력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농후하다고 볼 수 있으나, 현대 광고 전략 등에 활용될만큼 강력한 통찰력의 소산이라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르 봉은 또한 군중 앞에 서는 지도자의 자질로서 ‘위엄’을 강조한다. “확언, 반복, 감염으로 유포된 사상들은 위엄으로 알려진 신비한 힘을 때맞춰 획득하면 심대한 위력을 발휘한다.” 이 대목을 통해, 우리는 괴벨스를 기용해 대중 선전 선동에 힘썼던 히틀러의 나치즘과 북한의 지도자 우상화의 근거를 짐작할 수 있다.

 

3. 군중 분류법과 군중의 종류

 

책의 마지막인 3부에서 르 봉은 군중에 대한 분류를 시도한다. 우선, 그는 군중을 이질적 군중과 동질적 군중으로 나누고 있는데, 여기서 민족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민족정신이 강화될수록 군중의 열등한 특성은 약화된다”고 봤던 것이다. 르 봉은 “견실하게 정립된 집단 정신을 획득한 민족일수록 군중의 무분별한 위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야만 상태를 탈피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르 봉의 이같은 관점은 자칫, 당대 제국주의에 대한 정당화 장치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견 위험해 보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이 민족적 우월성에 근거해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한 나치에게도 활용된 알리바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어쨌든 르 봉은 군중에 대한 분류를 더욱 세밀화해 범죄적 군중과 배심원 군중, 유권자 군중, 의회 군중으로 나눠 고찰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유권자 군중에 대한 르 봉의 관점이다. 그는 특히 보통 선거 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 근거로 제시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문명이란 우등한 소수의 지식인들이 창조하는 것이므로, 이들이 문명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차지하고 하위단계들은 지식 수준이 낮은 일반 대중이 차지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래서 문명의 위대성은 오직 인원수의 위세만 과시하는 열등자들의 투표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엘리트 의식에 입각해 군중과 절차적 민주주의를 바라보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연장선에서 그는 “사회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모든 인간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점에서 만인은 실질적으로 평등하게 무지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는 말로 민주 정치의 발전에 대한 허무주의적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보통 선거에 대한 그의 비판적 관점을 감안컨대, 의회를 향한 그의 시선도 그리 곱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그는 “의회 군중은 극도로 흥분하면 통상적인 이질적 군중들과 같은 상태를 보이면서 극단적인 감정을 표출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슬쩍 유보적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의회 군중의 모든 특성은 다행히도 지속적인 것이 아니다. 의회는 어떤 순간에만 군중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르 봉은 군중의 부정적 속성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강력한 요소로 민족성을 재차 강조한다. “이전까지 민족들은 여전히 군중이었음이 분명하지만, 이 단계부터 군중의 유동적이고 변덕스러운 성격의 저변에 단단한 기반이, 즉 민족성이라는 특성이 형성되어 국민의 가변 영역을 좁은 범위로 국한하고 우연의 작용력을 제압한다.” 그 반대로 르 봉은 “고립된 개인들의 단순한 무리로 전락은 민족은 원시상태로 즉, 군중의 원시상태로 복귀하고 만다”고 덧붙인다.

 

그의 이같은 시각은, 앞서 언급한대로 민족성의 우와 열을 가르려는 그의 관점의 단면을 엿보게 만든다. 군중의 속성에 대한 그의 탁월한 식견과 통찰에도 불구하고 민족에 대한 그의 관점이 제국주의적 침략과 파시즘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됐을지도 모른다는 비판적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다.

 

II. SNS 시대, 사이버 공간의 군중과 집단 지성 사이

 

앞서 살펴본 르 봉의 <군중심리>가 통찰한 군중적 속성이 최근의 인터네 공간에서 드러나는 경우는 적지 않다. 이를테면, 르 봉이 군중의 속성으로 적시한 익명성과 감염성, 피암시성은 몇 년 전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궜던 이른바 “개똥녀” 사건에서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이같은 상황은 최근에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지하철 선빵녀” “막말녀” 등의 동영상이 인터넷 공간에서 유통되고, 이를 근거로 이른바 해당 인물의 ‘신상 털기’가 진행되며 당사자에 대한 무자비한 사이터 테러가 감행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같은 익명성과 감염성, 피암시성이 활용된 사이버 군중의 속성은, 네티즌 스스로에 의해서라기보다 인터넷 언론의 선정적 보도를 통해 확대재생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즉, 위와 같은 사례들을 인터넷 언론들이 경쟁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익명성을 가진 네티즌들의 댓글 폭력을 유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어찌 보면 네티즌들을 잔인하고 폭력적인 우중으로 만들고 있는 장본인은 다름 아닌 인터넷 언론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에는 SNS 시대가 도래하면서 ‘집단 지성’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SNS가 공론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네티즌들이 군중적 속성보다는, 스스로 판단하고 토론하며 여론을 형성해가는 공중(Public)으로서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했다는 관점이다.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SNS를 통한 투표 독려 운동이 실질적으로 젊은층의 투표 참여에 작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 주류 언론에서 보도되지 않는 이슈가 SNS 공간에서 유통되다 주류 언론에 채택되는 역의제 설정(Reverse-Agenda Setting) 현상이 심심찮게 목격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네티즌들에게서 발견되는 공중으로서의 속성은 연구 검토될 가치가 충분하다.

 

이와 관련해 최근에 대유행한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를 둘러싼 논쟁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시사점을 안겨준다. 알다시피 김어준, 김용민, 주진우, 정봉주 등이 참여한 ‘나꼼수’는 현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넘어 욕설과 막말을 서슴지 않는 직설 화법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또한 서울시장 선거 전에는 나경원 후보의 1억 피부과 이용설을 제기해 주목을 끌었으며 최근에는 선관위에 대한 디도스 공격에 내부의 협력자가 있다는 주장을 제기함으로써 관심을 모았다. 이들이 내뱉는 발언은, 곧바로 주류 언론의 뉴스로까지 다뤄질 정도이며, 이들이 수시로 여는 콘서트에는 수 천에서 수 만 명의 관중이 운집할 정도로 인기가 있다. 한마디로 ‘나꼼수 현상’이라는 말을 만들어낼 정도로 나꼼수는 정치사회적 이슈 메이커이자 문화적 신드롬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나꼼수가 기존 언론을 능가하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나꼼수의 위험성을 경고하거나 비판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우선 이들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음모론적인 주장을 지나치게 단언적으로 남발함으로써 수용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런 비판을 가장 적극적으로 제기한 인물은, 미학자이자 시사 평론가인 진중권이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나꼼수가 근거가 미약한 음모론의 진원지이며 나꼼수를 지지하는 이들은 종교적 신앙처럼 그들을 떠받들고 있다는 골자의 비판을 거듭했다.

 

나꼼수에 대한 그의 비판 발언을 몇 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BBK 실소유주는 정봉주 말이 맞지만, MB가 주가 조작에까지 관여했다고 믿지는 않는다.”

“여러분들(나꼼수 지지자들) 틈에선 교리처럼 통하는 믿음이 있겠죠. 하지만 여러분들의 신앙 공동체 밖에까지 그 믿음을 강요하진 마세요.”

“야담과 실화, 저열하고 비열한 공격, 언젠가 똑같이 당할 겁니다.”

“한방에 보낼 자신이 없으면 방아쇠를 당기면 안된다”

“(나꼼수는) 익명의 집단속에 숨어서 용기를 칭찬받을지 몰라도 책임을 지는 것은 특정한 개인이다.”

“나꼼수는 물가에 내놓은 애들처럼 아슬아슬하다.”

 

이렇게 되자 지금까지 진보 논객으로 인기를 끌었던 진중권은 나꼼수 지지자들로부터 온갖 비판과 욕설에 직면해야 했다. 때마침 조선 일보 등의 보수 언론들이 나꼼수에 대해 비판의 수위를 높이자 적지 않은 나꼼수 지지자들은 진중권이 그들과 한통속이라는 식의 비난을 이어갔다.

 

이 대목에서 르 봉이 통찰한 군중의 속성이 드러났다고 보는 것도 타당한 관찰일 것이다. 나꼼수를 비판한 진중권의 상황을 르 봉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이렇다. “얼마간이라도 정연한 논리적 설명에만 익숙한 논리적 정신의 소유자는 군중이 반감을 표하거나 논란을 제기하더라도 논리적 설득 방식에 호소하기를 중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논증이 군중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으면 경악하고 만다.”

 

진중권이 나꼼수의 음모론이 위험하다고 경고한 것은 르 봉의 다음과 같은 우려와도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개인과 마찬가지로 군중은 언제나 모든 주제에 대한 기정된 여론을 필요로 한다. 이런 여론의 인기 여부는 그것에 담긴 진실이나 오류와는 무관하고 오직 그것이 위엄을 지녔느냐 아니냐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요컨대 진중권은 나꼼수가 진실에 근접하려는 노력보다는, 위엄으로써만 여론을 호도하고 있고, 나꼼수 청취자를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이성적 공중이 아닌, 맹목적으로 추앙하고 따르는 군중으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우려를 표명한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꼼수가 갖는 순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는 입장도 만만치 않다. 나꼼수가 근엄한 시사 평론이 아닌 엔터테인먼트의 형식을 띄었다는 점에서 대중의 추앙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문화적 현상이며, 나꼼수가 정치적 무관심 계층에게 정치적 각성의 기폭제 역할을 단단히 했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나꼼수의 토크 콘서트 장에 가보면, 전통적으로 정치 무관심 계층으로 분류돼온 20-30대 여성들이 대거 나와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나꼼수는 청취자들의 군중적 속성과 더불어 그들이 주류 언론에서 접하지 않는 새로운 시각과 접근을 계기로 집단 지성화될 수 있는 아젠다 세터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평가가 타당할 것 같다. 진중권이 우려한 맹목적 추앙의 위험성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꼼수의 청취자들이 지금까지 도외시한 정치의 중요성을 상기하게 됐다는 것은 분명히 평가할만한 긍정적인 영향일 것이다. 또한 진중권과 나꼼수의 논쟁 자체도, SNS 공간의 공론장(Public Sphere)적 특성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을만한 것이다.

 

이처럼 최근 사이버 공간은 인터넷 언론들이 조장하는 군중적 특성과, SNS와 대안 언론을 중심으로 한 집단 지성적 특성이 혼재된 상태에서 진화하고 있다. 21세기 사이버 군중을 재단하는 데 있어서 르 봉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함과 동시에, 또 다른 버전의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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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nemAgora

‘장애인’이 등장하는 휴먼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심경이 복잡해진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고단한 삶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너무나 척박한 우리의 환경 때문만도 아니다. 많은 부분, 내 복잡한 심경의 이면에는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과연 온당한가, 라는 질문이 끊임 없이 맴돈다.

쉬운 말로, 저들도 저렇게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얼마나 오만한가, 따위의 태도를 얘기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 속에서 장애인은 나의 삶에 용기를 불어 넣는 일종의 핑계로 작용한다. 장애를 가진 삶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가늠해보려는 게 아니라, 그들을 동정하고 있는 내게 여전히 측은지심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는데 장애를 동원하는 셈이다. 재난 영화를 보며 나의 안전을 확인하는 것처럼, 장애인의 삶이 어쩌면 비장애인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또 다른 방식의 스펙터클로 전시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승준 감독의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3월 22일 개봉)을 보러 갈 때도 내게 그런 기우가 있었다. 막연하게 장애인 부부의 사랑을 담은 작품이라는 정보만 들었을 때, 나는 이 영화 역시 장애를 통해 비장애인을 위로하려는 영화가 아닐까, 혹은 (물론 아주 많이 필요하긴 해도) 장애인의 인권 확장을 힘주어 말하는 계몽적 발언의 연장선에 놓인 영화는 아닐까, 내심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기우였다. <달팽이의 별>은 감독 이승준이 그의 카메라가 포착한 인물들에게 얼마나 겸손하게, 또 얼마나 성찰적으로 다가가려 애썼는지를 상영 시간 85분 내내, 조용하고도 힘차게 웅변하고 있었다. ‘인간 극장’ 류의 TV 휴먼 다큐에서 너무나 숱하게 봐 왔기에 장애를 담은 작품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방식, 그러니까 인물들의 글썽이는 눈물을 클로즈업하고, 그리하여 객석에 편리한 눈물을 선사하려는 시도를 이 작품은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시청각 장애인 조영찬 씨와 척추 장애인 김순호 씨가 일구는 일상의 단면을 툭 포착한 채, 거기에서 그들이 감각하는 세계를 가늠하려 애쓴다.


이 지점에서 영화 속의 인물과 관객 사이에는 기묘한 감각의 역치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를테면, 온전한 시청각을 보유하는 나는 조영찬 씨를 보고 있는데,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조영찬 씨는 내가 보지 못하고, 내가 듣지 못하는 또 다른 감각의 세계를 내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파도 소리를 들으려 애쓰고 빗물을 느껴보려 애쓴다. 조용히 나무를 껴안는다. 그리고 나무와 말 없는 대화를 나눈다. 그것을 조근조근 자신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 김순호 씨에게 말해준다. 나무랑 데이트하는 게 재밌냐고 묻는 아내를 이끌어 함께 데이트하자고 말하듯, 이 영화 속의 조영찬 씨는 감각이 있는 자들이 감각하지 못하는 세계, 그것의 실존을 확인시켜주며 같이 들어보지 않겠냐며, 같이 느껴보지 않겠냐며 말한다.


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히 비장애인들을 위해 설계된 세상에서 불편을 감수해야 함을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거꾸로 비장애인들이 감각하지 못하는 어떤 차원의 것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베란다 틀 밑으로 흐르는 빗물을 손가락으로 느껴보는 그 느낌, 서로 몸을 부딪히며 서걱이는 나뭇잎의 감촉.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비장애인들은 전혀 궁금해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청각을 온전히 보유한 이들의 감각이 지나치게 무뎌진 사이, 그러니까 너무나 많은 자극들에 의해 닳고 닳아 버린 사이, 그는 아주 작은 순간의 어떤 것을 세밀하게 감각한다. 그리고 그 미시적 감각의 세계 안에서 우주를 본다.


재론컨대,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은, 장애를 동원해 비장애인을 위로하는 영화가 아니다. 시청각 장애인과 척추 장애인 부부가 함께 기대어 만들어 낸 촉수를 통해, 우리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시야의 확대, 청각의 확대, 촉각의 확대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이 다큐멘터리가 가진 가장 강렬한 특별함이다. 조영찬 씨는 말한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별을 보지 못했지만 별이 있다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다.”

2012.3. 빅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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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심리학은 참 얄궂은 학문이다. 
인간의 숭고한 사랑을 짝짓기라 표현하는 건 참을만 하지만,
이성을 대하는 모든 행위를 "성전략"이라는 표현으로 단순화한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애정 행위는 오로지 번식의 욕망을 사수하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이 된다.
톡 까놓고 얘기해서 남자는 씨를 뿌리고 싶어 안달이 난 수컷일 뿐이고, 
여자는 좋은 씨를 얻기 위해 이리 저리 수컷들을 고르고 따지는 까다로운 암컷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애정 행위에 대한 진화 심리학적 접근은 유용하다.
나의, 혹은 다른 이의 불가해한 행동의 언저리에 어떤 생물학적 기제가 숨어 있는지를 짐작하는 것은, 
행동의 패턴을 이해하고 유추하며, 예측하는 재료들이 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진화 심리학이 매력적인 것은, 그것의 고찰 대상이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점이다. 

두꺼운 책을 들면 손목에 전해지는 하중감 떄문에라도 부담감을 쉬이 느끼는 나로선, 
거의 600페이지에 달하는 <욕망의 진화>(데이비드 버스, 사이언스 북스)를 단숨에 읽어내린 이유를 다른 데서 찾을 수가 없다.

왜 남성들이 그토록 숱한 좌절을 맛보며 이성을 유혹하려 애쓰고,
여성들은 왜 그리 사랑과 헌신을 갈구하는지, 
그리고 남성의 사회적 지위와 키를 중시하는지에 대한 단초들이
내겐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롭게 다가왔다.

요컨대, 모든 것은 유전자의 명령이다.
조상 인류들의 지난한 번식의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성전략은 공진화해왔으며,
상대 이성에 대한 남녀의 선호도와 연애 패턴도 바로 그런 성전략의 일환 속에 놓여 있다.
그렇다고 이런 접근이 남녀의 연애를 천박한 것으로 폄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사랑을 관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랑이란, 사멸될 운명에 놓인 나를 번식을 통해 연장시키기 위한 인간의 선택이며, 
그것을 더욱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감정적 진화의 산물이다. 
이런 해석 또한 아름답다. 
나의 온갖 추잡함도 실은 인간이기에, 내 유전자에 새겨진 진화적 본능에 의한 것임을 이해하는 것은, 
약간의 위안마저 된다. 

어찌됐든, 기왕 유전자의 번식 명령을 거역하기로 한 나로선 
어떤 유전자의 명령에 어떻게 따라야 할지에 대한 모종의 힌트까지 얻게 된 셈이다.
그게 어찌 내 마음대로 되겠냐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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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필연적 부수물은 '기대'다.
일방이든 쌍방이든, 모든 관계는 기대를 낳고, 기대의 총량은 관계의 지속성과 경향적으로 정비례한다.

문제는, 관계의 주체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여러 문제가 파생된다. 
기대는 파생되는 문제의 핵심에 놓인다.
상대의 행동이 기대와 어긋날 때, 갈등이 불거지고 균열이 생긴다. 
갈등과 균열이 되풀이될 때, 흔히들 어떤 종류의 심리적 포기 상태에 이르는데, 
관계 자체를 냉소해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때도 있다. 
이런 이들에겐 누군가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고백컨데, 내게도 이런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실제로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난 경험을 했기 때문인데, 
부끄럽게도 그 파탄 난 관계는 혈육이었다.

내 경우, 기대보다는 기대를 받을 때 두려움이 커진다.
종종, 내 삶을 파고든 관계 파탄의 상황은 대개 나에 대한 누군가의 기대치를 내 스스로 거부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나로선 거부할 수밖에 없었지만, 
상대항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게 적절한 설명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인정하기에 그들의 기대치가 너무 컸거나, 
그들의 상태가 매우 불안정했다. 
이게 변명으로 들린다면, 이렇게 말하자. 
내가 거짓의 기대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관계로부터 도망다니며 살 수는 없다.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고 숙명이다. 
그러나 살얼음을 밟다가 빠져본 경험이 있는 자가 다시는 얼음 주변에도 가지 않듯, 
나는 욕망하되 관계하지 않는 기이한 관계, 
혹은 관계가 아닌 관계, 
맺지 않되 이어진, 아주 황당무계한 그런 관계의 이데아를 설정해 놓고 서성거린다. 
얼음 호수 저편에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바보 같지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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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정역 인근에 꽤 괜찮은 순대국집이 있다.
나는 오늘도 그곳에 가 저녁을 먹었다.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주 한 병을 시켰다.
밥은 먹지 않았다.
그냥 순대국을 헤적거리며 그 안의 내용물들을 젓가락으로 주워 먹었다.
주워 먹고, 소주 한잔을 들이 부으며 창밖을 바라본다.
취기가 돌수록, 머리 속을 맴돌던 언어들이 이합집산을 한다.
그리고 둥글고 둥근 심상을 만든다.
뭐라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 심상은 때마다 다르고 공간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달라서
오늘의 심상을, 이를테면 나는 "텅빈 수용"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내겐 하루의 특정 시간만 되면 막무가내로 슬퍼지는 병이 있었다.
예전엔 심야에 다다르면 그 병이 도지곤 했는데,
요즘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슬픔도 익숙해지는 것인지, 어느 순간엔 나쁘지 않다.
별나게도 슬픔을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는 사라지는 수고조차 사실은 귀찮아하는 인간이다.
꾸역 꾸역 살다 보면 뭐 그럭저럭 재밌는 일도 벌어진다.
그 덕에 숨을 쉰다. 죽음을 유보한다. 혹은 삶을 연장한다.
텅텅 비운 채 삶이, 세계가 내게 비쳐지는 모습을 나는 본다.
보는 것만으로도, 나로선 도를 닦는 일이다.
한창 치기 어릴 때는, 어떤 순간에, 구역질을 내기도 했지만,
나는 내가 완전히 비어 버리지 않은 이상,
그것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하기가 저어된다.
이런 건 모두 속하고 속한 삶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는 자의 몸부림이다.
내가 바보라는 건 너무나 일찍 알아버렸지만,
시간이 참 길기에 당혹스럽다.
여하튼 숨은 쉬고, 숨을 쉰 대가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언제나 그렇듯, 결론은 없다.
그 사이 밤이 됐고, 겨울 기운이 맥락 없이 목으로 스며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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