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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필연적 부수물은 '기대'다.
일방이든 쌍방이든, 모든 관계는 기대를 낳고, 기대의 총량은 관계의 지속성과 경향적으로 정비례한다.

문제는, 관계의 주체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여러 문제가 파생된다. 
기대는 파생되는 문제의 핵심에 놓인다.
상대의 행동이 기대와 어긋날 때, 갈등이 불거지고 균열이 생긴다. 
갈등과 균열이 되풀이될 때, 흔히들 어떤 종류의 심리적 포기 상태에 이르는데, 
관계 자체를 냉소해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때도 있다. 
이런 이들에겐 누군가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고백컨데, 내게도 이런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실제로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난 경험을 했기 때문인데, 
부끄럽게도 그 파탄 난 관계는 혈육이었다.

내 경우, 기대보다는 기대를 받을 때 두려움이 커진다.
종종, 내 삶을 파고든 관계 파탄의 상황은 대개 나에 대한 누군가의 기대치를 내 스스로 거부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나로선 거부할 수밖에 없었지만, 
상대항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게 적절한 설명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인정하기에 그들의 기대치가 너무 컸거나, 
그들의 상태가 매우 불안정했다. 
이게 변명으로 들린다면, 이렇게 말하자. 
내가 거짓의 기대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관계로부터 도망다니며 살 수는 없다.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고 숙명이다. 
그러나 살얼음을 밟다가 빠져본 경험이 있는 자가 다시는 얼음 주변에도 가지 않듯, 
나는 욕망하되 관계하지 않는 기이한 관계, 
혹은 관계가 아닌 관계, 
맺지 않되 이어진, 아주 황당무계한 그런 관계의 이데아를 설정해 놓고 서성거린다. 
얼음 호수 저편에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바보 같지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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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nemAgora

합정역 인근에 꽤 괜찮은 순대국집이 있다.
나는 오늘도 그곳에 가 저녁을 먹었다.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주 한 병을 시켰다.
밥은 먹지 않았다.
그냥 순대국을 헤적거리며 그 안의 내용물들을 젓가락으로 주워 먹었다.
주워 먹고, 소주 한잔을 들이 부으며 창밖을 바라본다.
취기가 돌수록, 머리 속을 맴돌던 언어들이 이합집산을 한다.
그리고 둥글고 둥근 심상을 만든다.
뭐라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 심상은 때마다 다르고 공간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달라서
오늘의 심상을, 이를테면 나는 "텅빈 수용"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내겐 하루의 특정 시간만 되면 막무가내로 슬퍼지는 병이 있었다.
예전엔 심야에 다다르면 그 병이 도지곤 했는데,
요즘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슬픔도 익숙해지는 것인지, 어느 순간엔 나쁘지 않다.
별나게도 슬픔을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는 사라지는 수고조차 사실은 귀찮아하는 인간이다.
꾸역 꾸역 살다 보면 뭐 그럭저럭 재밌는 일도 벌어진다.
그 덕에 숨을 쉰다. 죽음을 유보한다. 혹은 삶을 연장한다.
텅텅 비운 채 삶이, 세계가 내게 비쳐지는 모습을 나는 본다.
보는 것만으로도, 나로선 도를 닦는 일이다.
한창 치기 어릴 때는, 어떤 순간에, 구역질을 내기도 했지만,
나는 내가 완전히 비어 버리지 않은 이상,
그것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하기가 저어된다.
이런 건 모두 속하고 속한 삶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는 자의 몸부림이다.
내가 바보라는 건 너무나 일찍 알아버렸지만,
시간이 참 길기에 당혹스럽다.
여하튼 숨은 쉬고, 숨을 쉰 대가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언제나 그렇듯, 결론은 없다.
그 사이 밤이 됐고, 겨울 기운이 맥락 없이 목으로 스며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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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nemAgora

안녕하세요, 최광희입니다.
12월 1일 신촌 아트레온에 개관하는 독립영화 전용관 의자 기부에 동참해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성금은 독립영화 전용관 측에 전달될 것이며, 여러분의 이름은 독립영화
전용관 두 개 좌석에 각 약 100명씩 새겨질 것입니다.
아래와 같이 기부자 명단을 정리했습니다. 입금자의 이름을 기준으로 했으며, 여러 분이 나란히
기재되기를 원하시거나 입금자 이름과 달리 기재되기를 원하는 분들의 요청을 적용했습니다.
혹 기부를 했는데도 이름이 누락돼 있거나 이름에 오탈자가 있을 경우, 제게 멘션으로
알려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기재되는 이름을 바꾸고 싶으실 경우에도 말씀해주시면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동명이인이 없는 한 가급적 변경하지 않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1차, 2차 모금 순서와 상관 없이 두 개 좌석에 새겨질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무순)

#좌석 1
 
정다영, 김미은, 강소영, 한송희, 강신애, 강미정, 지길웅, 김호정, 장정여, 하해성, 이완은,
오주은, 박영심, 이슬비, 구현빈, 끙J, 방연수, 정지연, 박혜영, 최현진, 전채린,
몽상가들프로덕션, 김혜나, 진명현, 이윤지, 조효정, 이성호, 석소정, 최주희, 박수환, 전경주,
한상희, 전은경, 진현우, 노희, 도상훈, 손현우, 이중윤, 강금주, 임정연, 정연철, 용세형, 박성화,
JUNHO, 김군, 나온희, 김한별, 김병섭, 이현수, 오민정, 임수정, 노덕일, 강민서, 최건최진,
김경민, 윤성은, 김혜수, 박썽희, 전진영, 민연숙, 이호윤, 임혜영, 이정민, 기우람, 유지연,
송경석, 김은정, 박은진, 박경목, 신은경, 오광석, 전정숙, 이은주, 조미연, 2011hufsNABE, 정민희,
남선희, 차지환, 진원석, 박세준, 김한솔, 유주현, 최승이, 박영철, 신선형, 오현종, 강현주,
채지수, 신은지횽아, 이옥주, 허지운, 백지영, 샌쥬, 박채화, 한국인도영화협회, 김선미, 한글로,
이주헌, 오윤미, 민은선(이상 100명)
 
#좌석 2
 
장일권, 전향숙, 장정희, 장기훈, 안상희, 이예리, 이화영, 김이현, 정소영, 김기현, 안창일,
권푸름, 이원석, 홍예은, 장석우, 조규성, 홍주혜, 이상미, 문정은, 김훈, 홍승혁, 배은나, 성낙환,
이영은, 샛별이, 윤정민, 김민, 김지영, 김원영, 김원준, 이선영, 오인옥, 최영환, 최형주, 신소현,
오지희, 전민아, 안경이, 김무열, 이난숙, 허기태, 정유문, 한광춘, 정승혁, 정지윤,
오민영, 양유정, 앨비스, 이혜미, 이연우, 박미향, 김윤진, 권진경, 문지영, 정자경, 성시춘,
송지영, 김미란, 원서영, 진소정, 문준호, 민지성, 박기석, 고건혁, 소금별은진, 울산야금이,
성혜경, 볼매임지, 이민규, 정지아, 이수경, 김계수, 한태윤, 고현경, 최꽃채운,
홍승균, 박이랑, 배진혁, 황정인, 이행복, 이선녀, 박영석, 김수정, 강미상, 정욱희, 양윤희,
윤수영, 김정은, 주성아, 메이, 최광희, 이동구, 김희숙, 바켐, 김연화, 백서보영, 임수지, 
고희정 (이상 9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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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nemAgora

바둑 용어 중에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덩치가 클수록 잘 죽지 않는다는 얘기인데, 영화 흥행에도 마찬가지로 통하는 말이다. 언뜻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면 위험도도 커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다. 100억 원 이상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른바 블록버스터의 경우에 40-50억 원 정도를 쓴 중급 규모의 영화보다 경향적으로 흥행 타율이 높다. 일단 제작비를 많이 썼다 하면 언론의 관심도도 높아지고, 그 많은 돈을 회수하기 위해선 홍보에도 엄청난 열을 올리게 된다. 자연스럽게 관객들의 기대치도 올라간다. ‘대마불사’ 효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일단 블록버스터라고 한다면, 최소 400~500만 명 이상의 관객 동원을 해야 본전을 뽑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영화적으로도, 그 많은 관객들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 흥행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블록버스터에 걸맞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전통적으로 한국 블록버스터의 단골 흥행 전략은, 역사적 비극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분단의 현실’을 담아내는 것이다. 분단만큼, 세대를 막론하고 대한민국 관객들에게 절실한 화두는 없기 때문이다. 일찍이 강제규 감독의 <쉬리>(1998)와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가 분단 소재 영화의 위력을 입증한 뒤, 많은 블록버스터들이 그 전철을 밟았다. <태극기 휘날리며>(2003)는 장동건과 원빈, 두 꽃미남을 민족상잔의 주인공으로 삼아 최초로 1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실미도>(2003)와 <웰컴 투 동막골>(2005)도 마찬가지 맥락의 영화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분단 소재의 블록버스터들이 다 흥행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곽경택 감독의 <태풍>(2005)은 장동건을 캐스팅해 놓고도 흥행 실패했다. 분단이 아닌, 이를테면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현대사의 아픔을 담은 작품 가운데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도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투입해 놓고도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블록버스터 SF를 표방한 <예스터데이>(2002)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을까?

‘코미디‘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빼먹었기 때문이다. 한국 관객들은 지나치게 진지한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공한 한국 블록버스터들은 비극을 근간으로 한 상태에서 희극적인 요소를 양념처럼 얹는 흥행 전략을 구사한다는 공통점을 보여 왔다. 그만큼 ’웃음‘은, 특히나 한국의 대중 관객들을 공략하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 간주돼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웰컴 투 동막골>과 <해운대>(2009)다. 두 영화는 각자 전쟁 영화와 재난 영화라는 장르적 특성에서는 다르되, 캐릭터들이 충돌하면서 파열되는 웃음을 선사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웃기는 데 그쳐서는 또 안된다는 것이다. 적절한 신파적인 요소를 가미해, 비극을 완성해야 한다. 종국엔 관객들을 울려야 한다는 얘기다.

‘가족’이라는 화두도 중요한 블록버스터 전략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전쟁 영화이지만 기본적으로 형제간의 이별에 대한 영화다. <괴물>(2006)도 마찬가지다. 한강 괴수에게 잡혀간 자신의 딸을 구해내기 위한 얼치기 아빠(송강호)의 눈물 겨운 사투가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해운대>는 어떤가. “내가 네 아빠다!”라고 외치는 박중훈의 대사가 상징하듯,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인물들의 사연이 드라마의 아주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블록버스터에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비주얼 전략이다. 무엇을 보여줄 것이냐다. 두말할 나위 없이 기존의 영화들에서 보지 못했던 신선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 <괴물>은 한강 괴수를, <디 워>는 용가리와 부라퀴를, <해운대>는 부산 앞바다를 강타한 쓰나미를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의 시선을 끌어들였다. 그렇다고 해서 굉장히 새로운 것들은 아니다. 사실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익히 봐왔던 볼거리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이 한국이라는 공간으로 옮겨 왔을 때 관객들에게 주는 정서적 효과는 또 다른 파장을 만들어낸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은,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2011.7 (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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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포머 2-패자의 역습>(2009)이 나왔을 때,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네이버 전문가 영화평에 이렇게 썼다. “외계 로봇들의 '휘리릭 뚝딱' 변신 과정의 디테일은 여전히 두통 유발하되, 피아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았던 엉킴 싸움은 많이 진화했다. 그래도 이건 여전히 스포츠카와 내게만 충성스러운 ‘쭉빵녀’와 변신합체로봇을 갖고 놀고 싶은,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들을 위한 영화다.”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들을 위한 영화”라는 문구가 문제가 됐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분들의 악플 세례가 쏟아졌다. 분을 삭이지 못한 어떤 분은 기어이 내 블로그까지 찾아내 비난 댓글을 달았다. 비난의 골자를 요약하자면, “영화를 평할 것이지 왜 관객까지 평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로선, 위의 문구를 가지고 내가 왜 관객을 평했다고 생각하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분명히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들을 위한 영화“라고 했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들”이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여, 내 글을 읽은 독자들이 지레 그렇게 생각했다면, 좀 심하게 말해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 아닌가? 나는 그들을 그렇게 규정한 적이 없는데, 스스로 그렇게 규정됐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여하튼, <트랜스포머>가 개봉할 때마다, 나는 끊임없이 이 시리즈가 소년적 로망을 충족시켜주는 영화라고 말하고, 이 영화에 몰려가는 적지 않은 관객들이 그런 내 관점에 비난을 퍼붓는다. 그런데, 정말 그렇지 않은가? <트랜스포머>는 소년적 로망, 더 정확하게 말하면 꼬마 마초의 로망에 화답하는 영화가 아닌가?

요즘은 관객들이 평론가 뺨을 후려칠 정도로 수준이 높아서, 이번에 나온 3편만 해도 “비주얼은 괜찮은데, 드라마가 영 별로“라든가, ”주인공 샘의 활약이 보이지 않는다“든가, 영화 그 자체에 대한 굉장히 분석적인 리뷰들을 쏟아낸다. 그러나 정작 이 시리즈의 정체, 그러니까 내가 앞서 비난을 산, 그런 견지의 이야기는 좀처럼 접할 수가 없다. 애석하게도, 아직 나의 시각은 ‘비주류’인 것이다.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을 위한 영화”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전히 모호하다면, 이른바 기획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입 아프지만 설명할 밖에 도리가 없다. 이런 회의 테이블을 상상해 보자. 마이클 베이가 말한다. “왜 대부분의 상업 영화들은 여성 관객들을 타깃으로 하지? 남성 관객들도 좋아할만한 영화 없을까? 그들의 욕망을 만족시켜줄만한 그런 영화 말이야. 평소 관람 선택권을 여자들한테 빼앗겼던 남자들이 일 년에 한번쯤 나 이 영화 안보면 차라리 죽을거야, 할 그런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여자들이 한번쯤 남자 소원 안들어주겠어? 그렇게 되면 대박인 거야!” 누군가 말한다. “야한 거 말이에요?” 마이클 베이가 말한다. “야한 건 애들이 못보잖아! 남자들이 좋아할만한 게 뭐지?” 누군가 말한다. “자고로 남자들은 자동차에 약하죠?” “자동차 좋다! 기왕이면 스포츠카라면 더 좋겠지, 스포츠카가 로봇이 되는 건 어때? 죽이지 않아?”“거기에 레이싱 걸까지 얹으면 죽음이죠.” 잠시 침묵. 그리고 환호, “브라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요소들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는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추억이라는 명분으로 로봇을 불러내고, 스포츠카와 레이싱걸 조합으로 현재의 욕망에 화답한다. 관객들, 특히 젊은 남성 관객들이 바로 그 지점에 열광할 것이라고 어림잡고 “어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하며 들이댄다. 그렇게 관객들을 상정해 놓고 만들어진 영화라면, 나는 관객들이 화를 내야 정상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평론가한테 화를 낸다.

명백히, <트랜스포머>는 남자들을 위한 영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영화에 몰려온 관객들이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고, 자동차를 자신의 얼터 에고로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이라는 면밀한 계산의 소산이다. <트랜스포머 3>의 미국 개봉 첫 주말 이 영화를 본 관객의 65%는 남자였고, 50%는 25세 이하였다. 마이클 베이가 제대로 공략한 것이다.

독자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을 즈음에 <트랜스포머 3>은 이미 500만을 넘어 다음 고지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이 시리즈에 대해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을 위한 영화”라는 평이 사실 지나치게 나이브한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이 시리즈는, 사실 영화가 아니라 영화인 척 하는,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을 위한 거대한 구경거리 서비스”일 뿐이다. 서비스를 영화로 착각하고 평했으니, 내가 잘못했다. 

2011. 7 (빅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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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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