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인터넷 매체들 가운데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Daum의 '의형제' 페이지에는 그가 등장한 신의 스틸컷이 없다. 그나마 'NAVER'에서 한 컷을 겨우 건졌을 뿐이지만, 이것도 강동원과 투샷이었으니 망정이지 그만 단독으로 나온 컷은 언감생심이다. <의형제>와 관련한 언론 기사들은 하나같이 송강호와 강동원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떤 매체도 전국환을 주목하거나 그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싣지 않았다. 이 영화에 범상치 않은 음악을 덧입힌 음악감독 노형우에 대한 정보도 빈곤하긴 마찬가지다.
정보가 공평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는 이를테면 이런 때다. 영화를 보고 나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관객들의 호기심에 화답해 주는 언론이 단 하나라도 있어야 하지 않나 싶은 것이다. 물론, 송강호와 강동원 얘기를 해야 히트수가 올라가니 그러는 것이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매체 수가 늘어날수록 정보 다양성은 반비례하니 참 씁쓸하게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럴 때는, 내가 직접 편집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권 매체가 뼈 아프게 아쉽다.
워낙 성량이 작았던 나는, 뉴스 리포트를 할 때마다 목이 쉬었고, 흡연량이 많은 날에는 녹음실에서 쉬어 터진 목소리를 가다듬느라 애를 썼다. 그래도 데시벨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목에 핏대가 서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시장통에서 악다구니를 쓰는 아주머니처럼, 나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못이기는 듯 악을 써댔다.
그런 게 몸이 배어서 나름대로는 방송을 할 때마다 약간은 격앙된 분위기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시나브로 나도 모르게 제 성량으로 돌아오는 건 어쩔 수 없었는지, 가끔 모니터링을 할때마다 함께 출연한 이들에 비해 내가 지나치게 차분하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요즘 출연하고 있는 KBS 라디오 '오징어'도 마찬가지다. 내 딴엔 방방 뜬다고 떴는데, 다시 듣기를 해보면 축 늘어져 있는 듯 들리는 것이다. 내가 이상한 걸까. 아니면 주변 분들이 워낙 데시벨이 커서 그런 걸까.
아닌 게 아니라, 요즘 TV 버라이어티쇼를 보자 하면 서로 방방 뜨기 시합이라도 벌이는 것마냥, 사람들이 죄다 신나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게 다 저 망할 놈의 '버라이어티 정신'의 화신 강호동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저 사람들은 뭐가 저렇게 신나고 열정적일까, 의아해질 때가 있다. 삐딱하게 보면, 모두들 조증 환자처럼 보일 때가 있다.
살아가면서 실제로 그렇게 신나고 방방 뜰 일이 많겠나 생각이 미치면 어쩌면 저들은 일종의 자기 분열에 시달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신나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척하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의 그 고요한 허탈감, 저들은 과연 그걸 어떻게 조율하고 사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라디오 출연을 갔다가 버라이어티쇼에만 나오면 방방 뜨는 한 아이돌 가수를 본 적이 있다. 그는 매우 지치고 피곤한 표정이었다. 이상하게도, 그에게 시민들 앞에서 피의 향연을 전시해야 하는 로마 검투사의 얼굴이 기시감처럼 어른거렸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된 데 대해 여러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연공서열을 중시하던 일본 직장 문화가 최근 계약직 파견사원을 대거 채용하는 방식으로 변화한 것이 간접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관점이 눈에 띈다.(이와 관련해 일본 드라마 <파견사원의 품격>은 최근 일본 직장문화의 단면에 대한 흥미로운 풍자를 전해준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이 증발됐고, 그것이 이른바 '나른한 노동'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남의 일 같지 않다. 직장 생활을 때려 치운 지 벌써 3년이 다 돼 가지만, 중간관리자 시절에 나 역시 절감했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언제든 직장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4대 보험의 혜택조차 보장되지 못하는 피고용인들에게 일에 전념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그런 이들에게 우리는 가족이네 뭐네, 사탕발림을 해봤자, 뻘소리로 들리는 게 당연한 노릇이다.
직장을 떠난 뒤에도, 이를테면 내 일과 관련한 업체들로부터 섭외 연락을 주고 받을 경우가 적지 않은데, 그때마다 '나른한 노동'의 분위기를 느끼곤 한다. 가장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 예절이 결여돼 있는데다, 담당자가 과연 이 일에 애정을 가지고 임하고 있나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내가 그의 직장상사가 아닌 이상 뭐라 시비 걸 여지는 없지만, 그래도 인간적으로 불쾌할 때가 있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기업들은 생산성이 예전만 못한데다, 근로자들의 자세가 형편 없어졌다고 한숨 짓고, 질 좋은 일자리가 아니면 기업에 충성을 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은 스스로 나른해지기 일쑤다.
도요타의 리콜 사태를 부른 계기는, 가속 페달이 고장난 자동차를 탔던 일가족이 목숨을 잃은 참변이었다. 나른한 노동이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 있다니 사뭇 끔찍해진다.
2007년 7월 FILM2.0
최근 나와 두 명의 친구가 함께 오픈한 팀블로그 '3M흥업'에서 때늦지만 흥미로운 논쟁이 벌어졌다. 대부업 광고에 나온 연예인들이 뭇매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이 블로그의 필자 가운데 한 분이자 현업 방송 프로듀서인 김경찬 피디가 ‘최민식을 위한 변명’이라는 글을 올린 것이 발단이 됐다. 연예인 대부업 광고 출연의 사실상 첫 테이프를 끊은 바 있는 최민식에 대한 그의 옹호성(?) 글은 포털을 통해 삽시간에 유포됐고, 이 글만 6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그와 나의 예상대로, 수 십개의 비판 댓글이 달렸다(악플이라는 말로 단순화할 수 없을 정도로 거기에는 논리적이고 설득력있는 반론들이 꽤 많았다).
여기서 김 피디의 글과 비판적 댓글들을 모두 일별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최대한 요약을 해보면 이렇다. 김 피디는 최민식 씨가 대부업 광고에 나간 것은 물론 신중치 못한 행동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배우로서의 가치까지 폄훼될 수는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예전처럼 전투력 100% 충전된 모습으로 (최민식을) 스크린에서 만나길 '학수고대'한다”고 말한 그는, “사채 광고에 출연한 ‘연예인 최민식’은 싫어도 연기에 올인하는 ‘배우 최민식’은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덧붙였다. 적지 않은 누리꾼들이 이같은 관점을 비판하는 댓글을 남겼는데, 대부분 그의 행동이 공인, 또는 유명인으로서 적절치 않은 것이었으며, 게다가 그가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에 발 벗고 나섰을 때나 스타 권력화 문제가 불거졌을 때 보인 태도에 비추어 보면 이율배반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게 아니냐는 의견들이었다.
김 피디는 이같은 반응에 대해 또 다른 두 개의 글로 그의 논지를 이어나갔다. 그는 “문제의 본질은 광고에 출연한 연예인이 아니”라면서 “인생관을 갖고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왔던 분들이 광고출연만으로 '서민들의 고혈을 짜먹는 인간'으로 매도되는 것에는 정말이지 동의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더 나아가 “대출광고 문제의 핵심은 연예인이 출연을 하는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면서 대출광고가 가능하도록 허용하고, 높은 이자율을 방치하고 있는 감독 기관이 문제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글에 이런 댓글을 달았다.“연예인 최민식과 배우 최민식에 대한 가치 판단을 별개로 하자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매독에 걸려 사망한 클림트의 그림이 1세기가 지난 뒤 근엄한 집구석의 벽들을 장식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최민식의 인격이 아닌 그의 연기와 캐릭터들을 기억하게 될 테니 말이죠.” 물론 김 피디의 관점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김 피디는 계속되는 네티즌들의 비판 댓글 행렬에 자극받아, 그의 표현대로 전투력이 더욱 왕성해져서인지, 주말 동안 ‘최민식과 델몬트, 사실은...’이라는 제목의 글을 덧붙였다. 여기서 그는 이미지에만 집착하는 여론 재판의 위험성을 꼬집었다. 요컨대, 많은 분들이 흥분하는 것은 대부업 광고에 나온 최민식이라는 이미지이며, 거기에 집착할 때 본질적 해결은 더욱 요원해진다는 논지였다. 최민식과 관련한 그의 마지막 호소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끝을 맺고 있다. “여러분의 공격이 연예인에게 집중 될수록, 대부업체와 그에 공생하는 정치세력은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서민들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겁니다.(중략) 인터넷에서 이슈를 생산하고 증폭시키는 작업은 약간의 '감각'과 '테크닉'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거대자본과 정치가들은 이 분야의 '타짜'들이죠. 과연, 우리는 그들의 공격을 막아낼 준비가 되어 있나요?”
그의 관점에 대해 미리 유보적 옹호의 입장을 피력한 바 있지만, 나는 이 문제를 놓고 주말 내내 생각했다. 과연 이미지와 본질은 별개인가? 대중은 이미지에 속고 있는 것일까? 이미지에 집중하는 것이 본질을 망각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급기야 이 문제를 술자리 안주거리로 삼아 아내와 설전을 벌이기까지 했다. 아내는 김 피디의 관점을 이렇게 비판했다. “이미지가 본질의 왜곡이라 해도 그 역시 어느 정도는 본질을 투영하고 있는 게 아닐까? 때문에 이미지를 비판하는 건 곧 본질을 비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해. 대중은 늘 이미지에 노출돼 있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 외에는 현실적인 방법이 없어. 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게, 대중은 이미지가 이율배반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기가 막히게 잘 알고 있다는 거야.”
이를테면, 대중 친화력 있는 연예인의 이미지를 활용해 사채의 본질을 희석시키려는 것이 요즘 대부 광고의 의도라면, 사람들이 비판하는 최민식도 바로 그런 대부 광고의 본질적 의도를 수행한 '이미지'이며, 그것은 곧 대부 광고의 기만성과 연관된 이미지와 다름 없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지금, 최민식이라는 이미지를 비판하는 것은 곧 대부 광고의 기만성을 비판하는 행위의 일부라는 논리다. 대중은 영화를 통해서든, 한미 FTA 반대 투쟁 현장에서든, 최민식을 처음부터 이미지로 인식했고, 이제 그 이미지가 그들의 기대를 배신한 데 대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배신된 이미지가 대부 광고라는 부정적 이미지와 결합해 또 다른 돌이킬 수 없이 치명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면, 이미지 덕분에 광고를 찍게 된 최민식은 손상된 이미지조차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머리가 복잡하다. 최민식과 관련한 일련의 논쟁을 관전하는 사이, 나는 대학 시절에도 감히 하지 못한 철학적 사유에 빠져 한동안 허우적댔다. 솔직히 여전히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대부 광고에 나온 최민식은 비판 받아 마땅한 것인가. 아니면, 그를 구성하는 개별적 가치가 아닌, 하나의 총체적 이미지로 바라보고 여론 재판의 도마 위에 올리고 있는 지금의 문화 현상을 안타까워해야 할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이미지는, 결코 정치성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더욱 그 안에 숨겨진 정치성의 정체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대부 광고에 출연한 연예인들이나, 그들과 대중 사이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는 나나 세상 공부가 절실하긴 매한가지다.




